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687
한자 金炯奎 旌孝閣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비슬로432길 2[본리리 22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김형규 정효각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비슬로432길 2[본리리 2256]지도보기
원소재지 김형규 정효각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간경리 국도변지도보기
성격 비각
재질 석재
크기(높이) 비좌 21㎝[높이]|82㎝[너비], 비신 137㎝[높이]|46㎝[너비]|22㎝[두께], 옥개 34㎝[높이]|86㎝[너비]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본리리에 있는 조선 후기 김형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

[개설]

김형규 정효각(金炯奎旌孝閣)은 김형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비 오른쪽 면 "전몽대연헌 모춘 상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안동 김병억 찬(旃蒙大淵獻暮春上澣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安東金炳億撰)"이라는 기록을 통해 을해년 음력 3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안동김병억(金炳億)[1858~?]이 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비는 1875년 또는 1935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형규는 이력이 자세하지 않으나 비문에 의하면 김녕(金寧)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에서 정릉 참봉[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능]에 제수하였다고 한다.

[위치와 현황]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본리리 금돌 마을 초입 도로변에 김형규 정효각이 위치하고 있다. 비각은 처음 달성군 옥포읍 간경리 국도변에 두었으나, 1983년 국도 확장으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비는 비각 안에 보존하고 있어 형태가 온전하며, 비문의 마멸도 없는 상태이다.

[형태]

김형규 정효각은 단칸 맞배지붕 건물이다. 비석은 비좌 위에 비신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규모는 비좌 높이 21㎝, 너비 82㎝이고, 비신 높이 137㎝, 너비 46㎝, 두께 22㎝이며, 옥개 높이 34㎝, 너비 86㎝이다.

[금석문]

앞면에는 '효자 참봉 김공 형규지려(孝子參奉金公炯奎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과 오른쪽 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오호라! 이곳은 효자 원모재(遠慕齋) 김녕 김공의 정려이다. 대개 효도는 본래 평소 일상 사이에 있는 법이지만, 만일 평소에 그 어버이를 잘 섬기고 그 마음을 다하여 남다른 감화로 드러났다면 더욱 특별하고 뛰어나서 정려를 세울 만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른바 특별하고 뛰어나서 정려를 세울 만한 자는 아마 공을 두고 이른 것이로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성동(成童)이 되자마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애훼(哀毁)의 절차를 예를 따라 행하였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봉양하면서 비록 이웃 마을에 잠시 출입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어머님께 아뢴 다음에 갔으며 돌아와 어머님을 뵘에 반드시 시각을 어기지 않았다. 일찍이 현창(玄昌) 땅에 간 적이 있었다. 밤이 깊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숲이 깊고 산이 캄캄해 길을 잃고 헤매는데 갑자가 한 거인이 나타났다. 거인이 그를 인도해서 살고 있는 동네에 앞장서 이르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어머님이 병이 들자 효자는 병세를 살피려 변을 맛보며 하늘에 낫기를 기도하였다. 어머님이 병중에 때 아닌 홍시를 먹고 싶어 하자 공이 구할 수 없음을 알고 감나무를 안고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니, 갑자기 두어 덩이 홍시가 가지 사이에 달려 있었다. 마침내 가져다 드리니 어머님 병이 정말 나았다. 하늘이 감동한 것이 아니겠는가.

뒤에 어머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상을 치렀다. 장례를 지내자 묘가 몇 리 밖에 있었는데도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찾아가 곡을 하며 춥거나 더운 날,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묘 앞에 무릎을 꿇는 곳은 이 때문에 풀이 나지 않았다. 조정에서 그 효행을 듣고 정릉(貞陵) 참봉에 제수했는데 아마 모두 그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무릇 효는 온갖 행실의 근원인데 공이 이미 효를 행하는 원칙을 우선 세웠으니 그 나머지 선행들과 미담들은 굳이 낱낱이 거론할 필요가 없다. 대개 공은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진 휘 시흥(時興)이 그 시조이다. 그 후손 휘 광저(光儲)는 본조에서 벼슬을 하여 대사헌을 지냈고 호는 농암(聾庵)이다. 휘 문기(文起)는 호가 백촌(白村)인데 단종조에 사육신과 함께 절의를 지켰다.

시호는 충의(忠毅)요, 장릉(莊陵)[장릉은 단종의 능]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아들 휘 현석(玄錫)은 호가 여병재(如甁齋)요, 또한 아비를 따라 순절하였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4대를 내려와서 휘 언신(彦臣)은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공훈록에 기록되었고, 휘 사봉(四鳳)은 호군(護軍)을 지냈다. 휘 복추(復秋), 휘 치원(致沅), 휘 계정(啓鼎), 휘 현복(賢福)은 그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이다. 공의 세덕(世德)의 원류가 이처럼 환하게 빛나는데다가 백촌과 여병재 두 선생의 높고 우뚝한 충절이 후손들에게 넉넉히 드리움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집에 효자가 태어남이 충효 일치함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일전에 교남(嶠南) 유림 우하영과 더불어 공의 아들 흥기, 도기, 선기가 장차 공을 위해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나라에서 내린 효행의 문 표시로써 뜻을 나타내고 받들고저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니 나 역시 떳떳한 인륜에 감흥이라, 드디어 사양치 못하고 졸문(拙文)이나마 특별히 그 사실을 이와 같이 서술하니, 이 비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도 반드시 사모함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을해 묘춘 상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안동김병억 지음, 성주이종식 씀.[於乎此孝子遠慕齋金寧金公之閭也蓋孝之道固在於平常日用之間而若於平常之間善/事其親能致其神兆異感則尤豈非特絶而可旌者乎所謂特絶而可旌者其公之謂歟公生/質異凡自幼無違父母命甫成童遭外艱哀毁如禮侍養偏慈雖隣里少出入必稟然後行其/返面必不違時刻嘗往玄昌地夜久歸家林深山黑失路迷茫忽有巨人引而前至所居洞巨/人忽然無跡母夫人有疾孝子嘗糞禱天母夫人於病中思非常紅柿公度不能求抱柿樹號/泣忽有數顆柿紅在枝間遂取而獻之母病良已豈非天感乎後遭母喪三年啜粥及葬墓在/數舍外必五日一省哭不以寒暑風雨惑廢墓前當膝處草爲之不生/朝廷聞其孝除貞陵參奉蓋畢數也夫孝爲百行之源而公旣先立其行源則其餘衆善諸美有不必枚擧也盖/公以金寧君諱時興爲鼻祖其后有諱光儲仕/本朝官大憲號聾庵有諱文起號白村/端廟朝與六臣幷節諡忠毅配莊陵忠臣壇生諱玄錫號如甁齋亦從父同殉贈夷判四傳/而諱彦臣龍蛇亂以扈/聖功錄勳諱四鳳官護軍諱復秋諱致沅諱啓鼎諱賢福其高曾祖/禰也公之世德原流若是爀然而矧惟白村如甁齋二先生巍忠卓節垂裕於後宜乎生孝子/於其家也忠孝一致豈不信然矣乎日嶠南之儒禹夏永與其公之子鴻基燾基善基將爲公/而建閣竪碑以表之閭渴余以文余亦彛倫之感耳遂不撲辭拙而特敍其事如此過此碑者/其必有油然之思矣/ 旃蒙大淵獻暮春上澣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安東金炳億撰/星州李鍾式書]

[의의와 평가]

김형규 정효각은 달성군의 인물을 재조명할 수 있게 하며, 후세들에게 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산교육장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