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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631
한자 朴惺 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232-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1년연표보기 - 박성 묘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49년 - 박성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06년 - 박성 사망
현 소재지 박성 묘비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232-2지도보기
성격 묘비
관련 인물 박성
재질 석재
크기(높이) 귀부 43㎝[높이]|110㎝[너비], 비신 220㎝[높이]|90㎝[너비]|22.8㎝[두께], 이수 90㎝[높이]|128㎝[너비]|48㎝[두께]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박성의 묘비.

[개설]

박성(朴惺)[1549~1606]은 조선 중엽의 학자·의사(義士)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庵)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배신(裵紳)[1520~1573]에게 사사하였으며, 과거 시험에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 최영경(崔永慶)·김면(金沔)·장현광(張顯光) 등과 사귀었다. 정인홍(鄭仁弘)과도 친했으나 그가 대사헌에 올라 권세를 부려 절교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정유재란 때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참모로 종군하고,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조정에서는 박성의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여러 관직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대암집(大庵集)』이 있다.

[위치와 현황]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234-2번지에는 대암 박성을 배향하는 송담 서원이 있다. 송담 서원의 좌측으로 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단칸의 맞배지붕 비각이 나타나는데, 이 비각 안에 박성의 묘비가 유존하고 있다. 비는 일반적으로 신도비로 알려지고 있으나 전면 상부에 가로로 ‘대암 선생 박 공 묘비명(大菴先生朴公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 비문은 현풍 현감으로 재임한 김세렴(金世濂)[1593~1646]이 짓고, 전액을 썼다. 기존에 글씨는 진사(進士) 전영(全泳)이 썼다고 하였으나,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의 박성 묘갈 개관에는 김공영(金公榮)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탁본 판독문에는 ‘전공형서(全公滎書)’로 읽고 해석에는 김공영이 지었다고 하였다. 탁본은 형(熒)으로 볼 수 있어 이름은 전영이나 전공영이 아니라 전형이나전공형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1636년 통신사행 중에 부사 김세렴이 발탁해서 능서관으로 참여한 거창군 초계면 선비 전형(全滎)[1609~1660]이라는 인물이 있어 이 전형이 글씨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탁본에는 ‘전공형서’로 되어 있지만 현재 비문에는 '완산(完山)[완산 이하 멸실]'이라는 글자가 있어 탁본과 다르다.

비는 전체적으로 형태가 양호하나, 비신의 하부 일부는 표면이 깨져 있는 상태이다. 비문은 전면은 약간의 마멸이 있으며, 후면은 일정 정도의 마멸이 있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고, 비신 하부 일부의 표면이 깨져 있는 곳은 비문이 없어져 버렸다.

[형태]

비는 귀부 위에 비신과 이수를 올렸다. 귀부는 형상이 단순하며 생략되어 있고, 이수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규모는 귀부 높이 43㎝, 너비 110㎝이고, 비신 높이 220㎝, 너비 90㎝, 두께 22.8㎝이며, 이수 높이 90㎝, 너비 128㎝, 두께 48㎝이다.

[금석문]

상부 전액에 '대암 선생 박 공 묘비명(大菴先生朴公墓碑銘)'이라 쓰여 있다. 전면에 비문이 있는데, 강세구의 판독과 박경수의 해석에 따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암선생박공묘비명

유명조선국 조산대부(朝散大夫) 청송 부사 대암 선생 박 공 묘비명 : 서문을 병기함.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지제교(知製敎) 김세렴(金世濂)이 짓고 전서를 쓰다. 김공영(金公榮)이 쓰다.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 선생이 도덕 학문으로 영남에서 일어나 도의로 사귄 이가 있으니 밀양(密陽)박공(朴公), 곧 대암 선생이다. 격치(格致)와 성정(誠正)의 학문이 강론되지 않고부터 이른바 학(學)이라는 것이 이단(異端)과 곡학(曲學)에서 잡출(雜出)하지만 지난날 한두 명의 선각자가 일어나 창도하는 자가 있지 않았으니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도(退陶) 이황(李滉)의 정맥(正脈)이 이에 단절되었다. 그것을 강론하여 밝히고 토론하여 서로 더불어 이택(麗澤)[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에 힘쓰는 것]의 벗이 된 자가 또한 적지 않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처음 낙천(洛川) 배신(裵紳)에게 학업을 받고 15~16세에 개연히 학문에 뜻을 두었다. 성장해서는 분발하여 힘써 행하였고 한번 변화하여 도(道)에 이르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과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엄숙하고 공손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공의 태만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만년에 『논어』를 매우 좋아하여 거처하는 당호를 학안재(學顔齋)라고 편액하고 동편 방을 사물(四勿), 서편 방을 박약(博約)이라고 하였다. 그 속에서 책을 읽으며 그만두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 읽게 하며 말하기를, ‘성현(聖賢)을 배우고자 한다면 이만한 책이 없다. 한훤당(寒暄堂)의 학문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였다. 매번 사람들에게 똑바로 앉기를 권장하고 스스로도 도리에 어긋나는 비벽(非僻)한 마음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찍 일어나고 밤이 깊어 잠이 드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첫 번째 일이다.”고 하였고 또 “배움은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데 이르러야 배움이라고 이를 수 있다. 나는 기질이 편애(偏隘)하여 넓고 크게 하는 것으로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스스로 대암(大菴)이라고 호를 지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도 그의 천성이니 악한 사람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는 것처럼 여겼다. 제자들이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반드시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홀로 수우당(守憂堂)[최영경(崔永慶)]이 몸소 초야에 거처하면서 남의 허물을 부르기 좋아하는 것은 그 몸을 죽이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라고 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님을 20년 동안 섬기면서 안색이 늘 기쁘도록 봉양함에 정성을 다했으며 닭이 울면 반드시 잠자리의 편안함을 여쭈었다. 돌아가시자 한 구기의 물도 마시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고 소상(小祥)에 비로소 보리밥을 먹었으며 3년 동안 쌀밥과 국을 먹은 적이 없었다. 상을 치르면서 한결같이 의례(儀禮)를 따랐다. 반곡(反哭)하고 의려(倚廬)에 거처하면서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뼈만 앙상하였다. 평소 새벽에 가묘(家廟)에 인사를 올리고 봄과 가을의 향사(享祀)에 비록 병이 났더라도 반드시 직접 관장하면서 흐느끼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제사를 받드는 것을 본 자라면 자기의 제사에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곽공(郭公) 간(趕)은 선생이 어렸을 때 스승이었다. 호방함을 자처하여 여자와 음악이 눈앞에 가득하였는데 선생은 약관의 나이로 그 문하를 출입하면서 여러 해동안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내외의 분별을 엄격히 하여 노복들이 감히 중문(中門)을 엿보지 못했고 집안이 늘 엄숙했다. 집안 사정이 본래 풍요로웠지만 옷은 해진 옷을 입었고 음식은 배를 채울 정도만을 취하여 외물이 화려한 것에 대해서는 범범하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우애가 돈독하여 백 명의 노비를 누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한때 종유했던 동료들, 수우당 최영경, 문목공(文穆公) 정구,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송암(松庵),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같은 사람과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서로 알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이 일에 감발하고 흥기하는 것은 한강이 주신 것이니 한강은 곧 나의 스승이다. 내가 어찌 벗으로만 대우하겠는가? 마땅히 그를 사우(師友)의 사이로 대우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힘을 얻은 것이 문목공에게 가장 많았기 때문에 말했을 뿐이다.

처음에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았는데 그가 사헌부(司憲府) 수장이 되어 오로지 남을 공격하는 것을 일삼는 것을 보자 편지로 그것을 충고하기를 ‘임금을 보필하면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신하의 장단점을 들춰내는 것으로 직분을 삼지 말게.’라고 하였다. 정인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집에 발문을 짓고 퇴계 선생을 비난하고 배척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선대의 현자를 모욕하고서도 군자이겠는가?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 마침내 편지를 써서 변론하니 정인홍이 답장하기를 ‘각자의 소견을 지키고 어지럽게 시비(是非)를 다툴 필요는 없다.’고 하여 선생이 마침내 절교하였다.

김학봉(金鶴峯)이 창원에 주둔할 때 선생이 참모(參謀)로 종사하였다. 왜적의 세력이 더욱 사납게 날뛰어 아침저녁을 보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지키지 못하면 강우(江右)는 보존할 수 없어서 회복(恢復)하는 데 터전이 없게 됩니다. 혹시 불행한 일이 있으면 공이 어찌 처리하겠습니까?’ 학봉이 말하기를, ‘다스리는 봉지(封地)가 있는 신하는 다스리는 봉지에서 죽는 것이 예다. 여기는 곧 나의 집이다. 그대는 피해서 떠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백이(伯夷)와 노련(魯連)이 무슨 관직이 있었습니까? 하물며 공과 생사(生死)를 함께 할 것을 약속했는데 어찌 초야에서 살기를 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학봉이 대범하게 여겼다. 학봉이 역병을 만나자 빈료(賓僚)들은 모두 피하였지만 선생은 홀로 떠나지 않았다.[有明朝鮮國朝散大夫靑松府使大庵先生朴公墓碑銘幷序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金世濂撰篆 全公滎書

文穆公寒岡鄭先生以道德學文起嶺南有道義交曰密陽朴公即大菴先生也自格致誠正之學不講而所謂學者雜出於異端曲學向不有一二先哲作而倡之一蠹寒暄晦陶正脈於是乎絶矣而其講明討論相與爲麗澤之益者亦且不少矣先生生有異質初受業於洛川裵紳年十五六已慨然志學及長發憤力行一變至道親歿棄擧子業不赴非孔孟曾思之書不讀終日端坐嚴恭莊肅人不見怠慢之容晩年酷好論語額所居堂曰學顏齋東寮爲四勿西寮爲博約讀書其中孜孜不輟有請學者必使先讀小學曰欲學聖賢莫如此書寒暄堂學問其出於此乎每勸人危坐曰危坐則自無非僻之心曉起盥櫛夜分乃寢曰夙興夜寐亦學者第一事也又曰學到變化氣質方可謂學余質偏隘不得不矯之以洪大遂自號曰大庵好善惡惡亦其天性於惡人若將浼焉及見子弟言人過必呵之曰獨不見崔永慶身居草野好招人之過以殺其身耶性至孝事母夫人積二十年極其色養鷄鳴必候寢息及歿勺飮不入口者累日小祥始食麥三年未嘗食稻茹醬治喪一從儀禮反哭倚廬哀毀骨立平居晨謁家廟春秋享祀雖病矣必親莅未嘗不唏噫怵惕若見其饗之者已祭未嘗不悲哀也郭公趕先生少時師也以豪放自處女樂滿前先生以弱年出入其門積有年紀一不注目人以爲難其處家也嚴內外之別奴僕不敢窺中門家庭之內斬斬也家業素豐衣取蔽體食取充腹於外物紛華泊如也篤於友愛以百口奴婢盡分與弟妹一時行輩如守愚堂文穆公東岡松庵旅軒往來不絶相得驩甚嘗曰吾之感發興起於此事者寒岡之賜也寒岡卽吾師吾豈可友之當待之以師友之間蓋其得力於文穆公者最多故云耳初與鄭仁弘相善及見其爲憲長專事搏擊以書規之曰以補衮格非爲心勿以掇拾臣下短長爲職及仁弘作南溟跋文詆斥退溪先生先生曰世豈有侮辱先正而爲君子者歟然吾不可不言遂作書辨之仁弘答曰各守所見不須紛紛爭是非也先生遂絶之金鶴峯之鎭居昌也先生以參謀從賊勢益獗朝暮莫保先生曰此而不守則江右不可保而恢復無根柢矣脫有不幸公何以處之鶴峯曰封疆之臣死於封疆禮也此卽吾家子則可避去矣先生笑曰伯夷魯連有何官守況與公約同死生其可草間求活耶鶴峯壯之及鶴峯遘厲賓僚皆避先生獨不去]"

이어 후면의 내용이다.

“학봉이 병이 심해지자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진실로 그대의 충성심과 신의가 여기에 이르게 했음을 알았네.’라고 하였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왜놈이 다시 날뛰자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여 조월천(趙月川)[조목(趙穆)]에게 가서 대장이 되기를 청하니 월천이 자신이 힘없고 늙었다는 이유로 선생을 추대했다. 마침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남쪽으로 내려와 막부에 맞이해 두고 곧 선생을 주왕산성 대장을 삼았다. 그를 대우함에 예와 공경을 다하여 말할 때마다 선생이라고 칭했다. 선생이 하루는 편지를 대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평생 서울 사람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는데 지금 이 늙은이를 위해 편지를 써주었구나.’ 이때 국사가 날마다 위급하여 선생이 봉사(封事) 16조를 올려서 큰 계책을 지극히 개진하였는데 말이 매우 이치에 맞고 절실하였다. 어떤 이가 치옥(治獄)에 관한 일을 지워버리고자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의 견해가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국사(國事)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찍이 팔을 걷어붙이고 애통해하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어서 눈물까지 흘렸으니 그 충성으로 분개하는 격렬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애초에 재주와 행실이 우뚝하여 왕자의 사부(師傅)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사포(司圃)에 임명되었고 공조 좌랑을 거쳐 외직에 나가 안음 현감이 되었다. 왜적이 침략했을 때 명나라 병사를 응접하였고, 장정을 선발하고 군량을 운반하였다. 행동이 시기에 합당했고 일을 처리함에 빠트리는 것이 없었으며 토호(土豪)나 우족(右族)들의 힘을 빌리지 않았으니 온 경내가 두려워하고 탄복하였다. 뒤에 좋지 않은 이들이 요직에 있게 되었을 때마다 모욕을 당하여 마침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청송의 주왕산 아래 거처를 마련해 생활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임명하였는데, 공조 정랑, 세자익위사 위수(衛率), 임천(林川)·영천(永川)·익산(益山) 군수, 군자감 부정(副正), 통례원 상례(相禮), 청송 부사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대단하지는 않았다. 병오년[1606년] 10월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으니 58세였다. 처음 선생이 오도(吾道)의 막중함을 자임(自任)하니 비록 여러 벗들이 선생을 바라봄이 또한 그러했지만 끝내 세상에 나가 배운 바를 펼치지 못했고 또 하늘이 준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으니 슬프구나!

선생이 죽은 지 36년이 지나 선생의 후사 박민수(朴敏修)가 여헌 선생에게 받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선친의 학문(學問)과 지행(志行)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없지만 다 기록해서 상세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문목공 만한 이가 없습니다. 지금 세상을 떠나고 다만 여헌 선생만 있을 뿐입니다. 그에게 선친의 영령(英靈)을 의뢰하여 욕되게도 행장(行狀)을 얻었으니 지하에 계신 선친을 사라지지 않게 하기에 충분하여 불초한 제가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있겠지만 묘갈명(墓碣銘)이 아직 없으니 그대의 한마디 말을 얻고자 합니다.’

내가 불민(不敏)으로 사양하고 곧 말하기를 ‘사실에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저 문목공과 같은 이를 벗으로 삼고도 묘지(墓誌)와 비명(碑銘)을 얻지 못했으니 그대가 슬퍼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그렇지만 노선생의 행장이 이와 같이 독실하게 믿음을 주어 털끝만큼의 한도 없을 것이니 문목공이 다시 살아나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의 덕렬(德烈)은 한두 가지로 예거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 큰 것은 학문(學問)과 지행(志行)만한 것이 없다. 대저 문목공이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으로 자임했지만 선생은 문목공이 두려워하는 바였으니 그 학문이 이미 지극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의 책을 읽고 행보는 관중(關中)의 장재(張載)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기필하였다. 구원(丘園)에 여유롭게 은둔하여 본래의 뜻을 더욱 견고하게 했으니 그 지행(志行)이 이미 지극했던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성(惺)이요 자는 덕응(德凝)이다. 비조(鼻祖)의 휘는 중미(中美)로 고려의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성림(成林)은 감찰(監察) 순(純)을 낳았다. 순(純)은 생원 사눌(思訥)을 낳았으니 선생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관찰사 김연(金緣)의 딸이다. 승지(承旨) 이광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지행(至行)이 있었고 단정하고 엄숙하여 훌륭한 덕에 짝이 될 만했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요절하였고 족질(族姪) 민수(敏修)를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딸 둘을 두었으니 군수(郡守) 이의활(李宜活)과 과거에 급제한 승지 황중윤(黃中允)이 그 사위이다. 측실의 딸은 김예립(金禮立)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자손이 모두 약간 명이다. 묘는 현풍(玄風) 송림(松林)의 언덕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성품이 천도에서 나온 것은 똑같아서/ 선과 악이 상대되어 나오는 것은 있지 않네/ 잘 양성할 줄 알아서 잃지 않음은/ 단지 힘씀이 게을리 하느냐 민첩하느냐에 달려 있네/ 정(情)을 단속하여 중(中)과 부합하니 공자는 길했지만/ 훌륭한 자질로 배움에 힘썼을 뿐만이 아니라네/ 체(體)가 확립하고 이미 명령이 예를 따르니/ 성심이 회복되어 애쓰지 않아도 욕심이 없었네/ 힘써 고현(古賢)따라 그 방안에 들어가니/ 오직 경(敬) 한 글자가 공자의 가르침이네/ 안팎의 노복들 또한 질서가 있었고/ 모두가 법을 따라 집안을 엄숙히 단속했네/ 행동거지 나에게 달렸으니 남이 어찌 단속하랴 / 잠시 백리의 백성을 한결같이 덕으로 다스렸네/ 다만 세자를 보내 은일(隱逸)자를 탐문하여/ 남유(南儒)로 일컬어진 건 어필(御筆)로부터 시작되었네/ 낙동가 포구 송림에 영원히 묻혔지만/ 큰 명성 백대에 백일처럼 빛나리/ 선하다고 반드시 하늘이 주신 목숨 기약할 수 없어/ 말로 기록하고자 해도 다 쓰기 어렵구나

숭정(崇禎) 14년[1641년] 5월에 세우다[鶴峯病革執手泣曰固知君忠信至此丁酉倭再猘先生欲倡義兵往請趙月川爲大將月川以衰老推之先生會體察使李公元翼南下迎置幕府旋以先生爲周王山城大將待之極其禮敬言必稱先生先生 一日臨書歎曰吾平生不作入京書今爲此老修書耳時國事日急先生上封事十六條極陳大計言甚剴切或欲刪去治獄事先生曰吾見已定其可改乎語及國事未嘗不扼腕痛歎繼之以涕泣其忠憤激烈如此先生初以才行卓異除王子師傅不起後拜司圃由工曹佐郞出爲安陰縣監當搶攘之際接應天兵簽丁輓粟動合機宜事以辦治不貸豪右一境畏服後値弗悅者當路乘時侮辱遂遞歸自此不出卜居于靑松之周王山下朝廷累除工曹正郞翊衛司衛率林川永川益山郡守軍資監副正通禮院相禮靑松府使並不至以丙午十月疾不起年五十八始先生自任以吾道之重也雖諸友望先生者亦然卒之進不得展布所學又不克永年以歿悲夫先生歿三十六年先生之嗣敏修持旅軒先生狀泣謂世濂曰先人學問志行無不聞然能盡而詳者莫文穆公若也今下世獨有旅軒先生賴先人之靈得辱之行狀足不朽先人地下者不肖孤死且瞑目然未有以碣之墓也願得子一言也世濂辭不敏則謂事有不可知者夫取友如文穆公而不得誌若銘於其竁宜子之慨然也雖然老先生狀其行若是其惇信無毫末恨文穆公復作不能易矣先生德烈不可一二擧其大者莫如學問志行夫以文穆公道德學問而先生文穆公所畏也其學問不旣至矣乎讀聖人書步武必關閩肥遯丘園益堅素履其志行不旣至矣乎先生諱惺字德凝鼻祖諱中美高麗密直司事有曰諱成林生監察諱純純生生員思訥是爲先生考妣曰光山金氏觀察使緣之女娶承旨李光軫女有至行端默莊肅克配令德生一子夭取族姪敏修後之女二人郡守李宜活承旨黃中允其壻也側室女適金禮立內外孫並如干人墓在玄風縣松林之原銘曰

性出於天道則一不有善惡相對出克知所養能不失只在用力怠與疾約情合中夫子吉不惟學力美資質體立已令禮爲率誠復不勞慾可窒力追古賢入其室惟敬一字孔子術內外僕隷亦秩秩左准右則嚴家律行止在我人孰尼蹔試百里民德壹但遣儲君問隱逸稱以南儒自御筆洛浦松林鎖鬱嵂大名百代垂白日善不必壽天可必欲載之言難盡述

崇禎十四年五月建]"

[의의와 평가]

박성 묘비는 송담 서원과 함께 박성의 생애와 나라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교육 장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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