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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604
한자 松潭書院
영어공식명칭 Songdamseow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234-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 송담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71년 - 송담서원 훼철
현 소재지 송담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234-1지도보기
성격 서원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경의당]
정면 칸수 5칸[경의당]
측면 칸수 3칸[경의당]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

[개설]

송담서원(松潭書院)은 1694년(숙종 20) 대암(大庵) 박성(朴惺)[1549∼1606]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박성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이다. 박성은 1549년(명종 4) 현풍(玄風) 솔례촌(率禮村)[현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서 태어났다. 낙천(洛川)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이원익(李元翼)의 막료로 종사, 주왕산 대장(周王山城大將)으로 활약하였다.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양 현감(安陽縣監)을 지낸 후 사직하였다. 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거처하는 집에 학안재(學顔齋) 현판을 걸어 놓고 학문을 추구하였다. 저서로 『대암집(大菴集)』이 있다.

[위치]

송담서원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송담 마을 동편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달성군 구지면 도동 1리 마을 회관에서 구지서로를 따라 약 60m 이동 후 우회전한 뒤 곧 좌회전을 한다. 도로를 따라 1.6㎞ 이동하면 좌측으로 1차선 도로와 함께 송담서원 입구 표지석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약 400m 올라가면 송담서원이 있다.

[변천]

송담서원은 『여지 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하여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1832~1833] ,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 『달성 군지』[1931], 『교남지(嶠南誌)』 등의 읍지류에서 확인되나 서원의 위치와 건립·훼철 시기만을 기술하여 간단한 내력만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원은 1694년 건립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서원의 건립 시도가 있었다.1634년(인조 12) 장현광(張顯光)이 발의하고, 지방 유림 75명이 동참하여 비슬산 기슭 쌍계에 박성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위패 봉안이 이루어지기 전에 소실되었다. 이에 1694년 지방 유림들이 다시 뜻을 모아 유택(幽宅)인 송림(松林)[현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송담서원을 건립하였다. 자료의 소략으로 건립 이후의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훼철 이후 복원 과정은 1998년 이헌주(李憲柱)가 쓴 「송담서원 복원기(松潭書院復元記)」 등을 통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송담서원은 방화로 소실되었다. 근래에 와서 외삼문인 덕양문(德陽門)과 강당인 경의당(敬義堂), 비각 등이 복원되었다. 복원 시기에 대해 「송담서원 복원기」에는 1994년[갑술(甲戌)], 『대구의 뿌리 달성』은 199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형태]

넓은 대지 위에 토석(土石) 담장을 두른 방형(方形)의 공간을 구획하고 정면에 출입문인 덕양문을 세웠다. 삼문을 지나면 강당인 경의당이 있다. 경의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으로, 전면에는 반 칸의 툇간을 두었다.

[의의와 평가]

송담서원대암 박성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 유림들이 공의하여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서원이다. 자료에 간략한 내력만 확인되며,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 역시 현대에 복원된 외삼문과 강당, 비각 등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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