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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의 민주대동신당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24
한자 徐相日- 民主大同新黨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운동
관련 인물/단체 서상일

[정의]

1950년대 대구 출신 서상일이 추진한 정치운동.

[역사적 배경]

서상일은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이후 민주국민당을 대신할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민주대동신당운동을 펼쳤다. ‘서상일의 민주대동신당운동론’의 핵심은 ‘민주·정의·반공산’에 있다. 서상일은 ‘민주·정의·반공산’ 기치 아래 민주대동의 범주를 비반동 민주 세력까지 포함하여 설정하였다. 즉, 자유당을 제외하고, 조봉암까지 포함하는 것이 민주대동의 범주였다. 서상일은 민주대동신당의 정강으로 ‘민족 통일과 자주독립 완수[국가]’, ‘민주·책임정치 실현하여 도의(道義) 국가 발전[정치]’, ‘만민 균등의 경제원칙 확립[경제]’, ‘호혜 평등의 자주외교[외교]’, ‘우리 문화 앙양, 세계 문화에 공헌[문화]’, ‘세계적 항구 평화 기여[평화]’ 등 7개 분야를 제시하였다.

[경과]

서상일의 민주대동신당운동은 1954년 11월 이승만 집권 세력의 사사오입개헌 파동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핵심은 조봉암의 참여 여부였다. 서상일은 조봉암을 김준연과 비교하며 조봉암의 참여를 주장하였다. 두 사람 모두 공산당 출신으로 대한민국에서 장관을 지냈는데, 한 사람은 관용되고, 다른 한 사람은 배척되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병옥, 김준연, 장면 등은 민주대동에 조봉암의 참여를 반대하였다. 특히, 조병옥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란 표현을 써가며 적극 반대하였다. 민주대동신당운동에서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로 나뉘었다. 더욱이 1954년 2월 민주대동신당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김성수의 사망은 신당 운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과]

서상일의 민주대동신당운동은 1955년 3월 25일 ‘호헌동지회 총회’를 계기로 결렬되었다. 호헌동지회 총회는 신당 촉진 18인 위원회를 자유민주파 일색의 9인 위원회로 개편하고, 조봉암의 신당 운동 참여 배제를 공식화하였다. 이후 신당 운동은 자유민주파의 민주당 창당, 민주대동파의 진보당 결성으로 나타났다.

[의의와 평가]

서상일의 민주대동신당운동은 이승만 정권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정당을 창당하되 ‘민주대동’을 원리로, 반이승만 정치세력의 대동단결을 내세우며 조봉암까지 민주대동의 범주에 포함하여 추진되었다. 하지만 조봉암을 반대하는 진영과 대립하며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로 나뉘었고, 마침내 민주당과 진보당이 각각 창당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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