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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삼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239
한자 大邱三絶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1월 15일 - 교남시서화연구회 설립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서병오염농산, 달성토성을 함께 일컫던 말.

[개설]

대구삼절(大邱三絶)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고 간 서화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와 기생 앵무(鸚鵡)로 알려진 염농산(廉隴山)[1860~1947], 달성토성(達城土城)[달성공원]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내용]

조선 중기에 화담(華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과 송도(松都) 명기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하였는데, ‘대구삼절’은 송도삼절에 빗댄 말이다.

서병오는 본관이 달성(達城)이며, 호는 석재이다. 당대에 서병오와 필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화국지재(華國之才),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한 시·서·화는 물론이고 거문고[琴], 바둑[棋], 장기[博], 의술[醫], 구변[辯]에도 뛰어나 팔능거사(八能居士)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출중하였다. 1922년 1월 서병오는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창설하였다. 교남시서화연구회는 대구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전국의 명사들이 모이는 명소로 발전하였다.

염농산경상감영(慶尙監營)의 행수기생(行首妓生) 출신인데, 본명은 염경은(廉敬恩), 호는 앵무이다. 구한말 대구광역시의 최고 기생으로 인정받았고, 대구기생조합소(大邱妓生組合所)달성권번(達城券番)을 운영하며 대구 지역 전통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염농산은 의기(義妓)로도 이름이 났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거금 100원을 의연금으로 쾌척하여 서상돈(徐相敦)[1850~1913], 김병순, 정재학(鄭在學)[1858~1940] 등이 기만 원씩 출연하기로 결의하도록 하였고, 1911년 대홍수로 유실된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용암면(龍巖面)의 두리방천을 복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37년에는 교남학교를 위하여 상당한 재산을 기부하였다. 염농산의 동생인 비취(翡翠)를 대구삼절에 함께 넣기도 한다.

달성토성은 삼국시대의 토축 성곽이다.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인데,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대략 4m 정도이고, 둘레는 약 1.3㎞이다.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216년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1736년 대구읍성을 쌓을 때까지 대구광역시의 읍성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대구신사(大邱神社)가 있었다. 현재는 달성공원으로 부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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