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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31
한자 金洪直
영어공식명칭 Kim Hongj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김홍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1년 8월 - 김홍직 비밀결사 전위조직준비위원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1년 8월 - 김홍직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1월 - 김홍직 비밀결사 전위조직준비위원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2월 2일 - 김홍직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 6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28일 - 김홍직 민주주의민족전선 진영지부 위원장 선임
출생지 1897년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민주주의민족전선 진영지부 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홍직(金洪直)[1897~?]은 1897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조직 결성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김홍직은 1920년 3월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미국인이 경영하는 중등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 1925년 10월 귀국하였고, 1930년 10월 이래로 전국을 누비며 활동하였다.

김홍직은 1931년 8월 초 김일식·이치용[일명 이우] 등과 함께 자신의 경상북도 지역의 공산주의화를 도모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전위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전위조직준비위원회는 대구 지역 좌익운동의 통일 기관 역할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학생운동·노동조합운동·사회과학연구회 등을 지도할 계획이었다. 김홍직전위조직준비위원회의 조직 책임을 맡았고, 김일식이 서기, 이치용이 서무 책임, 곽수범이 선전 책임을 맡았다.

김홍직은 1931년 11월 말 김일식·이삼문 등과 함께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전명석(全明石)을 만나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는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갖게 하여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을 정치 투쟁으로 전환함으로써 공산주의사회 실현하고자 하였다.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는 의장·학생부·공장부·관공서부·노동부 등의 부서를 두었는데, 김홍직은 식료생산부 책임을 맡았다.

김홍직은 1931년 12월 4일 대구격문사건을 계기로 대구 지역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되는 바람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2년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홍직은 출소 뒤 고향인 김해에서 농민조합운동을 펼치다가 검거되었고, 1938년 2월 2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김해공산당농민조합재건사건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징역 2년 6개월 구형받았다.

김홍직은 광복 후 경상남도 진영에서 민족통일촉성 진영지구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6년 2월 28일에는 민족통일촉성 진영지구연맹을 해소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진영지부를 결성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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