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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광주학생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084
한자 大邱- 光州學生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생운동

[정의]

1929년 10월부터 1930년 3월 사이 대구에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발생한 학생운동.

[역사적 배경]

1929년 10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신간회도 활성화될 때, 대구에서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학생 중심의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광주학생운동 발생 직후 대구 지역 학생들은 경북구제회관에서 각 학교 대표자회를 열고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표자회에는 계성학교의 이원우(李元雨), 조활용(曺活湧), 대구농림학교 김을용(金乙龍),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1938년 경북여자고등학교로 개칭]의 곽진숙(郭鎭叔), 권수진(權誘鎭)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위 계획을 사전에 알아차린 계성학교 교장이 계성학교 학생들을 귀향시켜 시위 운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대구농림학교에서는 학생 일부가 애국가[이별의 곡]를 부르고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1930년 1월 12일에는 대구청년동맹신간회 대구지회박명줄(朴明茁)의 주도하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문학봉(文學奉)과 여러 명의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을 선동하여 시위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4학년 대표인 권수진이 동급생들과 함께 1월 18일 광주피검속학생석방 요구서를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단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시위 운동 계획은 학교 당국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실패하였고 붉은기에 쓴 맹약서는 압수당하였다.

1930년 1월 18일 대구경찰서는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한 격문을 대구 지역 각 학교에 뿌린 혐의로 허동훈을 검거하였다. 1930년 3월에는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와 대구농림학교에서 각각 동맹휴교 투쟁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결과]

대구의 광주학생운동은 만세 시위 운동과 동맹휴교 투쟁 그리고 격문 투쟁을 펼쳤으나 대체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28년 9월 대구 지역 학생운동으로 인하여 학생운동 조직이 무너지고, 관련 재판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일제 관헌과 학교 당국의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의와 평가]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하자 대구의 학생들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동맹휴교 투쟁과 격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와 민족운동의 고양에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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