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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동 줄땡기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057
한자 流川洞 -
영어공식명칭 Yucheon-dong Julddaenggigi|Tug-of-War in Yucheon-dong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유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놀이 장소 유천동 - 대구광역시 달서구 유천동 지도보기
성격 민속놀이
노는 시기 정월대보름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유천동에서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하던 민속놀이.

[개설]

대구광역시 달서구 유천동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줄다리기를 하며 놀았다. 이를 ‘유천동 줄땡기기’라 한다.

[연원]

유천동 줄땡기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놀이 도구 및 장소]

유천동 줄땡기기에 쓰일 줄은 동네 청년들이 담당하여 만든다. 청년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줄을 드리고, 이웃 마을에서 구경을 올 때 줄을 만들어 와서 보태기도 하였다. 유천동에서 만든 줄과 다른 동네에서 만들어 온 줄을 엮어서 원줄과 종줄을 만들었다. 목줄의 굵기가 굉장히 컸으며, 줄을 당길 때 줄이 한 자[30.3㎝] 이상 공중에 떴다고 한다.

[놀이 방법]

유천동 줄땡기기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거행되었다. 정월 초에 주최자가 5~6명 모여서 줄다리기 진행에 대하여 의논하고, 마을의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으면 구체적인 줄다리기 준비를 한다. 유천동 줄땡기기에 드는 경비는 주최자가 짚을 많이 내고 나머지는 집집마다 나누어 내었다. 또한 이웃 동네에서 줄을 보태어 주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줄다리기를 하면 마을에 풍년이 들고 마을 생활에서 평화로운 삶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천동 줄땡기기를 하기 전 마을의 돌방아를 중심으로 동민들을 두 편으로 나누고, 각각 줄을 하나씩 만들어서 서편은 암줄, 동편은 수줄이 된다. 줄을 당기는 날, 동네 청년들은 줄을 서로 마주보게 놓고 각기 상대방의 기를 꺾으려고 한바탕 기세를 올린다. 줄을 걸 때 서로 실랑이를 벌이면서 음담패설을 주고받기도 한다. 암줄이 숫줄을 덮어 씌우고 고를 건다. 고를 거는 것과 동시에 줄을 당기게 되는데 이때 징을 친다. 그리고 깃대의 지휘에 따라 일제히 줄을 당기기 시작하는데, 30분가량 당기다가 쉬기도 하고 시간을 정하여 쉬기도 한다. 줄다리기를 쉴 때는 줄을 깔고 앉아서 상대편으로 당겨 가지 못하게 하며, 아낙네들은 치마에 돌을 담아 와서 줄이 당겨 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유천동 줄땡기기는 옆에서 구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줄다리기에서 승리한 쪽은 줄을 갖게 되고 세금을 감면받았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유천동 줄땡기기에서 서쪽[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동쪽[수줄]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이 줄을 각각 여성과 남성으로 인격화하여 풍농을 보장하는 신성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줄땡기기를 하고 난 후 부드러워진 줄은 소여물로 사용하였고, 사용한 깃발은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여성에게 비싸게 팔았다. 이처럼 유천동 줄땡기기는 그 과정이 생산력을 보장하고 생명력을 북돋아 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만약 여자가 줄을 넘으면 줄다리기를 할 때 줄이 끊어진다고 하여 여자가 줄을 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기도 하였다.

[현황]

세시풍속과 같은 우리 전통문화는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적·문화적 수탈로 말미암아 사양길을 걷게 되었고 해방 후에는 일부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미신으로 배격되기도 하였다. 유천동 줄땡기기 또한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전통문화가 탄압받으면서 중단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다시 재개되지 못하였다. 현재 유천동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동민들이 많아서 전통적인 공동체의식 또한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줄다리기는 초등학교의 운동회나 동아리의 친선 체육대회에서 가끔씩 놀이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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