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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751
한자 券番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 기생조합에서 권번(券番)으로 개칭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 있던 기생조합.

[개설]

권번(券番)은 기녀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예를 학습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변천]

1909년 4월 일제에 의하여 관기 제도가 실질적으로 폐지되면서 서울에서 활동하던 경기(京妓)는 물론 평양을 비롯한 지방의 향기(鄕妓)들도 서울에 정착하여 기업(妓業)을 이어 갔다. 서울에 기생 수가 증가하자 기생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예 학습도 할 수 있는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1909년 9월 설립된 한성예기조합으로 알려져 있는데, 1908년 「기생단속령」이 발포되는 것으로 보아 이보다 일찍 설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서울과 남도 출신 기생들이 광교기생조합을 조직하고, 평양 출신 기생을 중심으로 한 서도 출신 기생들이 다동기생조합을 조직하였다. 1914년 기생조합이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바뀌게 되면서 광교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기생조합은 대정권번으로 바뀌었다. 1918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 기생들을 중심으로 한남권번이 설립되었고, 삼패 기생 중심으로 경화권번도 설립되었다. 그 후 서울에는 조선권번, 대동권번, 대항권번, 경성권번, 종로권번, 삼화권번 등이 부침하였다.

대구에서 관기가 실질적으로 없어진 것은 박중양이 대구군수로 부임한 1906년 7월이며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와 경상감영에 소속되어 있던 200명 전후의 서기, 하인, 관기를 모두 없앴다. 대구부의 기녀들이 1910년 5월 무렵 기생조합소를 설립하였다고 하는데,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구성]

대구에는 관의 허가를 받은 조선인 권번 달성권번과 일본인 권번 대구권번이 있었다. 사설 권번은 대구제일교회 뒤편 발방아골목, 교동시장 안, 옛 한국전력 대구지점 앞, 동성로 제일은행 건너편 등에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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