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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462
한자 宗家
영어공식명칭 The head family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충희

[정의]

대구광역시에 현존하는 조선시대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온 문중의 큰집.

[개설]

종가(宗家)의 사전적 의미는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이지만, 종가는 전체 부계친족(父系親族) 집단의 맏이 집안을 가리키는 대종가(大宗家)와 대종가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운 종가를 이룬 소종가(小宗家)가 있다. 『예기(禮記)』「대전(大傳)」 편에서 유래한 종법(宗法)에 따르면 부계친족의 맏이는 대대로 영원히 종가를 이어 가니 이것을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종(宗) 또는 대종(大宗)이라 하고, 맏이가 아닌 자손이 별도로 5대를 이어 가 일가를 이루어 오세이천(五世而遷)의 종을 이룩하니, 이것을 소종(小宗)이라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나오는 「가제의(家祭儀)」를 중시하면서 고조할아버지까지의 위패를 소종가에 모시며 기제사(忌祭祀)를 행하였는데, 이렇게 고조할아버지 제사를 함께 지내는 소종 집안을 일반적으로 ‘당내(堂內)’라고 칭하여 한 집안으로 인식하였다.

소종가가 지리적으로 대종가에서 먼 곳에 자리잡게 되거나, 소종가에서 유명한 인물이 나오게 되면 새로운 파(派)를 이루어 하나의 문중(門中)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의 종가는 소종가에서 형성된 문중의 핵심이 되는 집이었고, 문중을 이끌어가는 집으로 인식되었다.

[대구의 종가]

18세기에 간행된 『대구읍지(大丘邑誌)』에는 당시 대구 지역에 문중을 이루어 세거하는 성씨를 기록하였는데, 대구의 중심지인 본부(本府)에 백씨(白氏)·하씨(夏氏)·배씨(裵氏)·서씨(徐氏)·이씨(李氏)·도씨(都氏)가 거주하였다. 속현인 하빈현(河濱縣)에는 신씨(申氏)·이씨(李氏)·송씨(宋氏)가 거주하였고, 수성현(壽城縣)에는 빈씨(賓氏)·나씨(羅氏)·조씨(曺氏)·혜씨(𣒎氏)·류씨(柳氏)·장씨(張氏)·최씨(崔氏)·신씨(申氏)·유씨(劉氏)·고씨(高氏)·정씨(鄭氏)·예씨(芮氏)·진씨(陳氏)·김씨(金氏)·이씨(李氏)가 거주하였으며, 해안현(解顏縣)에는 모씨(牟氏)·백씨(白氏)·하씨(河氏)·신씨(申氏)·정씨(丁氏)가 거주하였다. 또한 자이소(資已所)에는 김씨(金氏)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2015년에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가 발행한 『대구 역사문화』를 보면 대구에 거주하는 44개 성씨의 문중을 언급하고 있다. 『대구 역사문화』에 소개된 성씨 중에서 대구의 세거지와 입향조가 기록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풍곽씨(玄風郭氏)는 고려시대부터 현풍에 세거하였으며, 조선 초기의 인물인 곽안방(郭安邦) 때부터 달성군 현풍읍 솔례(率禮)[현풍읍 대리]를 세거지로 정하였다. 현재 현풍 지역에는 암곡서원(巖谷書院)·예연서원(禮淵書院)·이양서원(尼陽書院)·화산서원(花山書院) 등의 현풍곽씨 관련 서원이 있다.

능성구씨(綾城具氏)임진왜란구회신(具悔愼)[1564~1634]이 대구광역시 북구의 서변동동변동 일대인 무태(無怠)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김녕김씨(金寧金氏)김문기(金文起)[1399~1456]의 7세손인 김응수(金應守)가 달서구 신당동에 입향하였고, 같은 항렬의 김귀송(金貴松)이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입향조가 되어 세거하게 되었다.

우록(友鹿) 김해김씨(金海金氏)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사야가(沙也可)가 조선에 귀순하여 김해김씨 성을 하사받고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다.

서흥김씨(瑞興金氏)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증조할아버지 김중곤(金中坤)이 처가의 세거지인 달성군 현풍읍 솔례(率禮)[현풍읍 대리]로 이거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귀남(金龜南)[1692~1727]이 달성군 구지면 예현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영양남씨(英陽南氏)는 남실(南實)[1599~?]이 동구 입석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성주도씨(星州都氏)는 신라 때 수창군(壽昌郡)팔거현(八莒縣)에 세거하였다. 그 후 팔거현이 성주에 소속되어 성주도씨라고 불렸고 팔거도씨라고도 한다. 족보 기록에는 940년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을 때 호족장(豪族長)인 도진(都陳)을 칠곡부원군(七谷府院君)에 봉하였으므로 도진을 성주도씨의 시조로 삼는다고 한다. 용산동병암서원(屛巖書院)이 있고, 서재리용호서원(龍湖書院)이 있다.

두릉두씨(杜陵杜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온 두사충(杜師忠)남구 대명동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고 한다.

문화유씨(文化柳氏) 대구 입향조는 도총부도사 벼슬을 한 유종(柳淙)이다. 동구 신암4동에 문화유씨도사공종중회관(文化柳氏都事公宗中會館)이 있다.

남평문씨(南平文氏)는 문익점(文益漸)의 18세손인 문경호(文敬鎬)가 1840년경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희(朴暿)가 현풍곽씨와 혼인하여 달성군 현풍읍 솔례(率禮)[현풍읍 대리]에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박성(朴惺)을 제향하는 송담서원(松潭書院)이 있다.

순천박씨(順天朴氏)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입향조는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다. 이곳에는 박팽년과 의리를 함께한 사육신을 제향하는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있다.

성주배씨(星州裵氏)배극념(裵克念)이 동구 해안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수원백씨(水原白氏)백인관(白仁寬)[1341~1421]이 북구 노곡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화암서원(華巖書院)이 있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한 서진(徐晉)이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져서 그 후손들이 달성(達城)에 세거하게 되었다. 달성공원 안에 달성서씨유허비(達城徐氏遺墟碑)가 있고, 북구 산격동구암서원(龜巖書院), 동구 도동백원서원(百源書院), 황금동덕산서원(德山書院), 이천리이강서원(伊江書院)이 있다.

충주석씨(忠州石氏)는 석언우(石彦佑)[1576~1609]가 임진왜란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일직손씨(一直孫氏)는 손세경(孫世經)이 수성구 황금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황금동청호서원(靑湖書院)상동봉산서원(鳳山書院)이 있다.

야성송씨(冶城宋氏)는 송원기(宋遠器)[1548~1615]가 북구 매천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매천동매양서원(梅陽書院)이 있다.

중화양씨(中和楊氏) 대구 입향조는 양희지(楊熙止)[1439~1504)인데, 양희지의 아들 양배선(楊拜善) 대부터 파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파동오천서원(烏川書院)이 있다.

성산여씨(星山呂氏) 달성군 가창면 입향조는 여희길(呂希佶)[1575~1657]이고, 북구 복현동 입향조는 여성주(呂聖周)이다.

단양우씨(丹陽禹氏) 동구 평광동 입향조는 우익신(禹翊臣)인데, 임진왜란 무렵 입향하였다. 단양우씨 달서구 월촌(月村)[현 달서구 상인동 부근] 입향조는 우전(禹奠)이다. 상인동낙동서원(洛東書院)이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윤인협(尹仁浹)[1541~1597]이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이란미(李蘭美)[1592~1660]가 달성군 논공읍 삼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이랑(李琅)[1562~?]이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영천이씨(永川李氏) 동구 내동 입향조는 이보관(李甫款)이고, 동구 방촌동 입향조는 이사경(李士慶)[1563~1628]이다.

인천이씨(仁川李氏) 수성구 파동 입향조는 이말흥(李末興)이고, 북구 무태[서변동·동변동] 입향조는 이주(李輈)[1556~1604]이다. 서변동서계서원(西溪書院)이 있다.

전의이씨(全義李氏)이필(李佖)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하빈이씨(河濱李氏)달성군 하빈면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며, 시조는 고려 명종 때에 예부상서를 지내고 하빈군(河濱君)에 책봉된 이거(李琚)이다.

아산장씨(牙山蔣氏)는 장주한(蔣柱漢)[1605~1669]이 수성구 고산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옥산전씨(玉山全氏)전백영(全伯英)[1345~1412]이 수성구 파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옥천전씨(沃川全氏)는 전시헌(全時憲)[1570~1649]이 대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한천서원(寒泉書院)이 있다.

동래정씨(東萊鄭氏)정사철(鄭師哲)[1530~1593]이 달성군 다사면 매곡동[현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는 제갈중경(諸葛重慶)이 임진왜란 무렵 달서구 본리동[소도촌]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조함장(趙咸章)[1597~?]이 서구 원대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인천채씨(仁川蔡氏)의 대구 거주가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은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살다가 고려 말에 두문동에 은거한 채귀하(蔡貴河)[?~?]이다. 그 후 인천채씨동구 미대동으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성재서당(盛才書堂)을 지었다.

평강채씨(平康蔡氏)는 채석견(蔡石堅)[?~?]이 달성군 현풍읍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경주최씨(慶州崔氏)최동집(崔東㠍)[1586~1661]이 동구 둔산동[옻골]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추계추씨(秋溪秋氏) 화원읍 입향조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달성군 화원읍 본리에는 추계추씨 선조 4명을 제향하는 인흥서원(仁興書院)이 있다.

김해허씨(金海許氏)는 허승립(許承立)이 임진왜란 무렵 달서구 갈산동에 입향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달서구 이곡동용강서원(龍江書院)이 있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허욱(許煜)[1783~1850]이 수성구 파동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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