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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061
한자 勞動運動
영어공식명칭 Labor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일어난 노동운동.

[개설]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지위와 권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운동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가계급과 자신의 노동가치를 보장받으려 하는 노동자계급 사이의 구조적 갈등에 의하여 발생하지만, 노동자와 국가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대구광역시의 노동운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된 노농운동의 형태를 띠었고, 항일운동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대구·경북 지역의 공업화 과정에서 합법·비합법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수많은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정권에 따라 정치운동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처음 결성된 노동운동 단체는 대구노동공제회이다. 대구노동공제회는 노동자들의 생활 문제, 즉 교육, 저축, 위생, 상호부조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의 지역 조직이었다. 대구노동공제회는 1920년 5월 27일 결성되었는데, 조선노동공제회의 지역 조직 중 가장 빨리 결성된 지역 조직이었다. 이어 1924년 3월 9일에는 대구에서 ‘남선노동동맹’ 창립대회가 열렸다. 창립대회에서는 14명의 중앙상무집행위원이 선출되었는데, 6명이 대구노동공제회 등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이었다.

노동운동 단체들의 결성과 함께 1920년대에 접어들어 대구·경북 지역에서 노동쟁의도 점차 활발하여졌다. 1923년 3월 유기 노동자와 전매국 노동자들의 파업, 1924년 4월 조선제사공장 여성 노동자 400여 명의 파업, 1927년 11월 원대동 정미소 노동자 파업 등이 일어났다.

[1945년부터 1970년대]

1945년 해방 이후 11월 5일 노동자로 조직된 전국 노동조합 연대 조직으로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결성되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전국에 80여 개의 지역 조직을 두었는데 대구에는 지방평의회가 설치되었다. 대구 지역 노동자들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중심으로 ‘8·23 대구전매청파업투쟁’, ‘9월 총파업’을 통하여 미군정에 항거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대구부청 앞에서 시작된 식량 배급 시위는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일대로 확대되어 간 10월항쟁이 시초가 되었다. 10월항쟁에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민생 시위도 함께 전개되었다.

4·19 이후 대구 지역은 제일모직 노조 건설 투쟁, 대구에서 시작된 교원노조운동, 대구일보 등 언론사를 중심으로 한 언론노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구 지역은 교원노조가 처음으로 발기되고 설립된 지역이었다. 4·19 직후인 1960년 4월 29일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대구 지역 중고등학교 교원 60여 명이 모여 어용 조직인 대한교육연합회 탈퇴를 선언하고 교원노조 설립을 선언하였다. 5월 7일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에서 교원 280여 명이 참석하여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교원노조를 창립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노동운동은 기나긴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과 일본 등 외세에 의존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 특히 노동쟁의에 대한 억압과 변혁적 노동운동의 핵심 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진행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진행된 산업화는 노동삼권의 제한, 민주노동조합 건설의 어려움을 낳았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결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연발생적 노동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혹독한 노동조건과 생활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의 자살·분신 등의 극한적 투쟁이 전개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 사건이 대표적이다.

1978년 1월 21일 대구 지역에서 발생한 ‘아리아악기쟁의사건’도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극한적 투쟁의 노동쟁의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아악기쟁의사건은 전국연합노조 경북서부지역지부 아리아악기분회 정재종 분회장 등 노동자 5명이 저임금과 노동자 구타 사건 등 노동 탄압에 항의하면서 당시 실질적 경영주였던 부사장 정구응의 집에 들어가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인 사건이었다.

[198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

1980년대 제5공화국 시기는 3저 호황이라는 외생적 요인에 의하여 겉으로는 고성장과 경제안정을 이룬 듯 보였으나 다수의 노동자·서민의 생활은 악화되어 갔다. 제5공화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사회로부터 개방화와 민주화 압력이 받기 시작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1983년 말 소위 ‘자율화 조치’라는 형식적인 유화 조치를 발표하게 되었다.

제5공화국 시기 대표적인 대구 지역 노동운동은 1984년 5월 25일 시작된 ‘대구택시총파업’이었다. 대구택시총파업은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며 벌어진 파업 투쟁이었으나, 대구 택시 노동자들의 희생 속에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이후 전개된 전국 각지의 택시 노동자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6년을 전후하여 대구 지역에서 본격적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노조 민주화 투쟁이 분출하였다.

1987년 7~9월에 걸쳐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 1987년 6·29민주화선언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활발한 노동운동이 전개되면서 노동조합 결성이 현저히 늘어났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170개 이상 사업장에서 노동쟁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동국화섬, 신라섬유, 성광화섬, 경산코오롱, 삼진섬유, 오대금속, 삼익공업사, 대구중공업, 청송기계공업, 한국경전기, 신성공업, 대성금속공업 등에서 새롭게 노조가 결성되었고, 삼립산업과 신아금속에서 노조 불신임을 결의하고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구 지역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중소·영세사업장과 여성 노동자 위주의 섬유산업 중심이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그룹별, 지역별 연대로 나가지 못하고 개별 사업장 투쟁에 머물렀다. 그 결과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노조가 파괴되거나 일회적 투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는 이후 강력한 민주노조 연대체 결성으로 이어져 1988년 12월 7일 대구경북노동조합연합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1989년 벽두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에 대한 반격이 개시되면서 대구지방노동청에서 민주노조 탄압에 항의하는 삼공전자, 대하통상, 대하염공 노동자들의 농성이 강제 진압되고 7명의 노동자가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대구지방노동청점거사건은 대구 지역 최초의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평가받았다. 대구지방노동청점거사건을 정리하면서 1989년 11월 8일 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을 결성하는 성과를 얻어내었다. 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과 같은 노동자 연대 조직이 속속 결성되면서 이를 토대로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되었다.

2021년 현재 대구 지역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구지역본부가 결성되어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정치·사회·경제적 지위와 권익 향상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노동운동은 아직 조직화하지 못한 많은 중소 규모 사업장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건설 문제, 「노동법」의 혜택에서 소외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권 확보 문제를 풀어야 할 과제로 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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