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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90
한자 丁七星
영어공식명칭 Jung Chilseong
이칭/별칭 금죽(錦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정칠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정칠성 대구여자청년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5년 3월 - 정칠성 사상단체 사합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7년 5월 27일 - 정칠성 근우회 창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25일 - 정칠성 근우회 대구지회 설립대회에 본부대표로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정칠성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17일 - 정칠성 전국부녀동맹 창립대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정칠성 북한 최고인민회의 평북대의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58년연표보기 - 정칠성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여성운동가
성별 여성
대표 경력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

[개설]

정칠성(丁七星)[1897~1958]은 189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근우회(槿友會)·신간회(新幹會)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운동을 펼치다가 월북하였다.

[활동 사항]

정칠성은 어릴 적부터 기예를 익혔으며, 1909년 1월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대구를 방문하였을 때 달성공원에서 다른 기생들과 함께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서울의 한남권번으로 옮기고 정금죽(丁錦竹)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서울 최고의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칠성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권번을 나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어학을 익히면서 타자를 배웠고, 다시 영국 유학을 위하여 1922년에 일본 도쿄[東京]영어강습소에 입학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1923년 1월 이춘수(李春壽)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구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인 대구여자청년회를 결성하였고,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칠성은 1924년 5월 무렵 서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선전 활동·이론 학습·여성 직업조합 설립 등의 활동에 나섰다. 1925년 3월에는 경상북도 차원의 사상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기예학교에 입학하였고, 일본에서 무산계급 해방운동과 여성해방을 목표로 한 사상단체 삼월회(三月會)를 결성하였다. 1926년 11월 말 삼월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하는 데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칠성는 1927년 5월 27일 서울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된 근우회에도 참여하였다. 근우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선전조직부에 소속되어 회원 모집을 맡았고, 이후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칠성은 1927년 6월 이후 중외일보사 평양지국 주최의 여성 문제 강연회에 연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진주·진남포·황주·겸이포·울산·영주·의주·인천 등지를 방문하여 여성운동을 주제로 연설하였다.

정칠성은 1928년 2월 25일 근우회 대구지회 설립대회에 본부대표로 참석하여 근우회 운동 취지를 설명하였고, 근우회 대구지회가 개최한 강연회에 “여성으로 본 현대 사회”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정칠성신간회에도 참여하여 신간회 본부의 의안작성부 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칠성은 1929년 7월 16일 근우회 제1회 전국대회에서 의안부 책임으로 선출되었고, 7월 27일부터 사흘간 개최된 제2회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신년을 맞아 언론과의 대담에서 농민·노동 여성의 교양 함양을 근우회의 역점 사업으로 밝히고, 탁아소 설립 또한 근우회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 가운데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인 정칠성은 주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등 인권 탄압을 받았다. 정칠성신간회 해소론 제기에 이어 근우회 해소론이 제기되자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광복 후 정칠성은 1945년 8월 17일 서울 YMCA회관에서 열린 전국부녀동맹 창립대회에 참여하였고, 농촌부에서 농촌 여성에 대한 계몽과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에 나섰다. 9월에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회 설비부 실행위원이 되었다. 정칠성조선공산당 경북도당의 부녀부장으로도 활동하였고, 1945년 12월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풍문여고 강당에서 열린 ‘전국부녀총동맹 결성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및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이후 조선민주여성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8·15폭동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미군정에 검거되었다. 이후 남한에서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활동 공간이 위축되자 월북하였다.

정칠성은 월북 후 1948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5년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후보, 1957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평북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칠성은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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