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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60
한자 張弘相
영어공식명칭 Chang Jeoku
이칭/별칭 장적우(張赤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 장홍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5년 12월 - 장홍상 고려공산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부터 10월 - 장홍상 사상강좌회 강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9월 3일 - 장홍상 신간회 대구지회 간사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1월 15일 - 장홍상 신우동맹 결성 지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27일 - 장홍상 혁우동맹 결성 지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월 - 장홍상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 결성대회 학생부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8월 - 장홍상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1월 5일 - 장홍상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6월 25일 - 장홍상 만기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 장홍상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선임
출생지 신동 -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신간회대구지회 간사|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장홍상(張弘相)[1902-?]은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신우동맹(新友同盟) 결성을 주도하였고, 조선공산당 경상북도 책임자로 활동하며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장적우(張赤宇)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장홍상은 1925년 12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6년 3월 대구민중도서관 창립준비 위원, 4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 7월 사상단체 신우회(新友會) 집행위원 겸 서무부장을 맡았다. 8월 22일에는 청년운동의 지역적 단결과 상호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구청년동맹이 발의한 대구부연맹[일명 대구청년연맹]의 발기대회에 준비위원 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발기대회는 대구경찰서 고등계가 불온하다는 이유를 들어 집회를 금지함으로써 열리지 못하였다.

장홍상은 박광세·김점학·시바다[柴田健介] 등과 함께 1927년 2월부터 10월까지 3회에 걸쳐 사상강좌회의 강사로 활약하였다. 사상강좌회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학생들을 의식화하였다. 1927년 6월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대구 청년운동 각 단체 간부회를 열고 청년단체 정리와 청년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합동이 결의되고, 합동을 위하여 구성한 전권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7월 23일 중외일보 지국에서 구성된 신간회대구지회설립준비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7월 24일에는 대구노동공제회 회관에서 열린 ‘대구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개회사를 진행하였다. 8월 7일 일본보병 제80연대 소속 육군 대위 세가와 쇼우오우[瀨川正雄]의 조선인 아동 폭행 사건에 대한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대책을 강구할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장홍상은 1927년 8월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대구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9월 3일 조양회관에서 열린 신간회 대구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간사로 선출되었으며, 곽진영과 함께 재무부를 맡았다.

장홍상은 1927년 11월 15일 대구 지역 중등학교 연합으로 만들어진 학생 비밀결사 신우동맹 결성을 지도하고 당수가 되었으며, 12월 27일 신우동맹을 해체하고 혁우동맹(革友同盟)의 결성을 주도하여 책임 비서가 되었다. 1928년 1월 김천에서 경북기자대회 직후 열린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 결성대회에서 학생부장이 되었고, 3월 조선공산당 경상북도 책임이 되었다. 이후 대구청년동맹 교양부장을 거쳐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장홍상은 1928년 8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2년 6월 25일 만기 출소하였다. 장홍상은 1942년 2월 23일 또다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장홍상은 광복 후 1945년 8월 열성자대회를 통하여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경북도책으로 선임되었고, 1946년 2월 좌익의 통일 기관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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