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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66
한자 朴贊雄
영어공식명칭 Park Chanu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9년 11월 14일연표보기 - 박찬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1월 23일 - 박찬웅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문예부 결성 참여
수학 시기/일시 1941년 3월 - 박찬웅 대구사범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4월 1일 - 박찬웅 노성공립국민학교 훈도 부임
몰년 시기/일시 1941년 - 박찬웅 일제 경찰에게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43년 2월 8일 - 박찬웅 예심 공판에서 재판 회부 결정
몰년 시기/일시 1943년 6월 21일연표보기 - 박찬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박찬웅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찬웅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노성면 -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학교|수학지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노성공립국민학교 -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노성공립국민학교 훈도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찬웅(朴贊雄)[1919~1942]은 1919년 11월 14일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를 결성하고 활동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박찬웅대구사범학교 심상과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동급생이던 강두안(姜斗安)·이태길(李泰吉)·박효준(朴孝濬), 4학년생 문홍의(文洪義)·유흥수(柳興洙)·이동우(李東雨), 3학년생 김근배(金根培)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결성하였다. ‘문예부’로 이름을 지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문예 활동을 표방함으로써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문예부원들은 매주 토요일에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모여 감상하고 비평하며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고, 이때 조선의 역사와 문화 및 시국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다. 1941년 3월 초에는 부원들의 작품을 편집하여 기관지 『학생』을 발간하기도 하였는데, 박찬웅은 편집과 제작에 참가하고 출판비의 일부를 제공하였다.

5학년생의 졸업을 앞둔 1941년 2월 중순 무렵, 문예부는 조직의 진로를 고민한 끝에 5학년이 졸업한 뒤에도 조직을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박찬웅은 졸업 후 1941년 4월 1일부터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에 있는 노성공립국민학교 훈도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학부형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윤독회(輪讀會)[문예부의 전신]가 발간한 항일 문예지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박찬웅도 이때 체포되어 경찰 및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1943년 2월 8일 예심에서 재판 회부 결정이 났으나, 재판이 열리기 전인 6월 21일 박찬웅은 미결수 상태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찬웅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73년 11월 3일 현 경북대학교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대구사범 항일학생 의거 순절동지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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