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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77
한자 朴孝濬
영어공식명칭 Park Hyoj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재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4년 3월 5일연표보기 - 박효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월 - 박효준 문예 잡지 『반딧불』 제작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1월 - 박효준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결성 주도
수학 시기/일시 1941년 3월 - 박효준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4월 - 박효준 도개국민학교 훈도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2월 - 박효준 도개국민학교 훈도직 파면
출생지 의성 외곡리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외곡리
학교|수학지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도개국민학교 -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도개공립국민학교 훈도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효준(朴孝濬)[1924~?]은 1924년 3월 5일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외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문예 잡지 『반딧불』을 제작·배포하였으며,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 결성을 주도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박효준대구사범학교 심상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하순부터 1940년 1월 초에 걸쳐 윤독회(輪讀會) 회원들과 함께 문예 잡지 『반딧불』 약 200부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상당수는 조국을 잃은 비애, 민족의식의 앙양(昂揚), 항일정신의 고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들이었다.

1940년 11월 초 박효준이태길(李泰吉)·박찬웅(朴贊雄) 등과 함께 학생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기로 협의하고 이태길의 하숙집에서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결성하였다. ‘문예부’로 이름을 지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문예 활동을 표방함으로써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1941년 2월 중순경 문예부원 중 8회생들의 졸업이 임박해지자 졸업 후의 활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에 졸업생들은 국민학교 훈도로 부임하는 즉시 아동들과 학부형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그 활동 상황을 매월 1회씩 박효준에게 보고하며 자신들이 쓴 작품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박효준은 졸업 직후인 1941년 3월 22일경 종전부터 조직되어 있던 독서 모임 후배들로 하여금 문예부의 과업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리고 월 1회 후배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활동 상황을 감독·격려하였고, 졸업생들이 보내온 활동 상황과 작품을 소개하였다. 1941년 4월 박효준은 경상북도 선산군에 소재한 도개국민학교 훈도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부터 6월까지 박효준은 수차례에 걸쳐 담임을 맡고 있던 6학년 학생들에게 독립의 필연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1941년 7월 말 일제 경찰에게 『반딧불』이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박효준도 이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12월 28일에는 문관징계령(文官懲戒令)에 의하여 훈도직에서 파면되었다. 1943년 2월 8일 공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예심이 종결되어 대전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예심 종결 결정 판결문에 사망으로 표시되어 있어 박효준은 재판 진행 도중 옥중에서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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