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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36
한자 朴得龍
영어공식명칭 Park Deukryong
이칭/별칭 박대득(朴大得)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 7월 1일연표보기 - 박득룡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7년 - 박득룡 대구공립중학교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박득룡 신우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1월 - 박득룡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0월 21일 - 박득룡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6월 5일 - 박득룡 대구형무소 내 만세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1년 7월 2일연표보기 - 박득룡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박득룡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칠성동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대구공립중학교 - 대구광역시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적우동맹 출판부 책임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득룡(朴得龍)[1908~1941]은 1908년 7월 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중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박대득(朴大得)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박득룡대구공립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15일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대구농림학교 학생들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신우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제2그룹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우동맹은 ‘맑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라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신우동맹은 12월 27일 조직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혁우동맹(革友同盟)으로 전환하였고, 박득룡장종환(張鍾煥)을 책임으로 하는 야체이카에 속하였다. 혁우동맹은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압박민족의 절대 승리를 기한다’라는 표어를 채택하였다. 1928년 2월 26일 혁우동맹원들은 ‘조선의 정치적 독립’, ‘모순된 사회현상 타파’, ‘만인 평등 신사회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적우동맹(赤友同盟)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는데, 박득룡황보선과 함께 출판부를 맡았다. 박득룡은 3월에 대구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고, 4월 30일에 적우동맹일우동맹(一友同盟)으로 조직을 변경할 때 이월봉(李月峰)과 함께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일우동맹은 ‘맑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학생운동을 실천적으로 행한다’라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박득룡일우동맹에 가담하였을 때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의 이순신(李舜臣) 장군 폄하 발언으로 인하여 동맹휴학 투쟁이 전개되었다. 박득룡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투쟁으로 인하여 1928년 11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은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었다. 박득룡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30년 6월 5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수감된 장진홍이 갑자기 사망하자 대구형무소 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9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의 가형(加刑)을 언도받았고, 10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득룡은 1941년 7월 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득룡의 공적을 기려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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