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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31
한자 朴基墩
영어공식명칭 Park Gidon
이칭/별칭 경림(景臨),회산(晦山),취죽헌(翠竹軒),양정(養正),몽와노인(蒙窩老人),찬당노인(贊堂老人),회노(晦老),박훈(朴壎)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박기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1년 - 박기돈 양지아문 양무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박기돈 중추원 의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박기돈 국채보상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박기돈 대한협회 대구지회 평의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박기돈 대구상무소 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박기돈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박기돈 대구운동협회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박기돈 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부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박기돈 사망
출생지 서울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경맥백합공원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남천로 188-60[흥산리 산6-1]
성격 민족운동가|서예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이자 서예가.

[개설]

박기돈(朴基墩)[1873~1947]은 18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구에 거주하며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서예가이자 경제인으로서 활동하며 교육운동·사회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박기돈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경림(景臨), 호는 회산(晦山)·취죽헌(翠竹軒)·양정(養正)·몽와노인(蒙窩老人)·찬당노인(贊堂老人)·회노(晦老)이다. 박훈(朴壎)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아버지는 박문환이고, 어머니는 제주고씨(濟州高氏)이다.

[활동 사항]

박기돈은 1901년 12월 대한제국의 양지아문(量地衙門) 양무위원을 시작으로 1903년 1월 상공학교 교관을 지냈고, 1905년 중추원 의관을 거쳐 통정대부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부산에서 국외 망명을 계획하다가 1906년 대구에 정착하였다.

박기돈은 1908년 대구 금연상채회에 가입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국채보상운동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금연상채회가 1908년 8월 26일 전 국민의 대동 결의를 주장하며 서울의 경성지원금총합소에서 전국 회의를 소집하는 공고문을 낼 때 이현주(李玄澍)·서상돈(徐相燉)·정재학(鄭在學)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대구 금연상채회는 각 군의 국채보상운동 진행 여부에 대한 의견서와 수금 총액 및 보관처를 작성하여 전국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망하였다. 하지만 대구 금연상채회가 제안한 전국회의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평의회가 국채보상 의연금에 대한 조사에 나서면서 열리지 못하였다.

박기돈은 1908년 3월 25일 특별총회를 통하여 결성된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참가하여 평의원이 되었다. 1909년 3월 25일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제2회 임원선거회에서도 평의원이 되었으며, 1910년 3월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제2회 설립기념식 및 총회에서도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박기돈서상돈(徐相敦)과 함께 1909년 대구목재소를 설립하였고, 1911년에도 대구제분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어 보혜약방을 비롯하여 원대동에 종이공장과 대안동에 이발관을 열었고, 회산출판을 운영하였다. 1910년 국채보상운동 이후 대구의 자본가들이 일본인의 거류민단일본인상업회의소에 맞서기 위하여 결성한 대구상무소(大邱商務所)의 소장이 되었다.

박기돈3·1운동 이후뒤인 1920년 5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설립을 위한 창립준비위원이 되었고, 6월 6일 대구역대구좌에서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제3회 정기총회에서도 회장으로 유임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1923년 1월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농업 문제를 주요 방침으로 내세우며 대구노동공제회로 전환하였는데, 박기돈대구노동공제회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박기돈은 서예 활동에 전념하였다.

박기돈은 1921년 대구의 대표적 사립학교인 명신여학교가 경영난을 겪자 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의장을 맡았다가 1924년 서희원(徐喜媛)에게 운영권을 넘겼다. 박기돈은 1922년 대구운동협회의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민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운동이 전국을 강타할 때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에서 활동하였다. 박기돈은 1947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기돈은 1922년 교남시서화연구회 결성에 참여하고 부회장이 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 서예 활동을 펼쳤다. 박기돈의 대표작으로는 1939년에 정몽주의 시 「차영주판상운」 3수 중 둘째 수인 「행서」를 들 수 있다. 또한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대장경’ 편액,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서쪽면의 ‘대방광전’ 편액, ‘팔공산 파계사’ 편액 등이 남아 있다.

[묘소]

박기돈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흥산리 산6-1 경맥백합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구상공회의소가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으로 경맥백합공원에 박기돈의 묘소가 조성될 때 묘비를 함께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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