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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촌동 달성하씨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17
한자 晩村洞 達城夏氏 世居地
영어공식명칭 Residential place of Dalseong Ha clan in Manchon-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달성 하씨 세거지.

[개설]

대구광역시의 옛 명칭인 달성(達城)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빈씨(賓氏)·서씨(徐氏)·하씨(夏氏)가 있다. 시조가 모두 모두 고려시대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면서 달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들 중 세거지와 집성촌을 형성한 것은 서씨와 하씨이다. 현 동구와 수성구 만촌동 지역에 서씨와 하씨가 나란히 집성촌을 이루어 후세 교육에 정성을 다하였다.

[명칭 유래]

만촌동의 본래 이름은 ‘늦이’ 또는 ‘각계’였다. 일설에는 모내기나 콩 심는 일 등 농사일이 다른 지역보다 늦고, 사람들의 행동은 물론이고 비가 내렸을 때 물도 가장 늦게 빠지는 등 모든 것이 다 느려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또는 임진왜란 이후 선비 유풍에 따라 학업에 열중하느라 농사일이 다른 지역보다 늦어져 ‘늦이’라는 의미의 ‘만촌(晩村)’으로 불렸다거나, 지역의 산세가 긴장감 없이 낮고 느슨하게 느즈러졌으므로 ‘느지미’ 또는 이를 줄여 ‘느짐’, ‘느지’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달성하씨는 시조이자 입향조인 하흠(夏欽)의 아들 하용(夏溶)이 호병(胡兵)을 물리친 공으로 달성군에 책봉되면서 현 남구 이천동수도산을 종산(宗山)으로 삼아 봉덕동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후 점차 동구와 수성구 만촌동 지역으로 거주지를 넓혀 갔다.

[자연환경]

만촌동 자연부락으로는 무등산, 쉬일목[지나가는 사람들이 쉬는 곳], 두루산[두류산], 바리곧에골, 샘골, 지장골, 두봉골, 각계골[임진왜란 당시 동래정씨 피난지], 남작골 등이 있었다.

[현황]

만촌동 달성하씨 문중은 일제강점기에 철저한 항일정신으로 호적 납부를 거부하고 토지조사사업에도 항거하여 정려각이 있는 땅 등을 빼앗기면서 세거지로서의 토대를 잃었다. 달성하씨 만촌동 세거지 관련 유적으로는 하광신(夏光臣)의 효행을 기리는 하효자 정려각(夏孝子旌閭閣)이 있고,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하시찬(夏時贊)[1750~1828]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유림이 힘을 모아 건립한 재실인 독무재(獨茂齋)가 있다. 또한 경덕사(景德祠)·돈목재(敦睦齋)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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