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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50
한자 菖蒲齋
영어공식명칭 Changpojae
이칭/별칭 구회신 재실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도성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39년연표보기 - 창포재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44년 - 창포재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0년 - 창포재 중수
현 소재지 창포재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남로 203-36[서변동 1271]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골기와 팔작지붕의 목재 와가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문중
관리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의병장 구회신을 추모하는 재실.

[개설]

창포재(菖蒲齋)능성구씨(綾城具氏) 무태(無怠)[현 북구 동변동·서변동] 입향조 구회신(具懷愼)[1564~1634]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구회신의 자는 경중(敬中)이고, 호는 계암(溪巖)이다. 아버지는 종사랑 구대성(具大成)이고, 어머니는 옥천황씨(玉泉黃氏)이다.

구회신은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구 팔공산(八公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유재란 때에는 경주로 가서 도체찰사(都體察使)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군관으로 종군하며 울산 서생포(西生浦)의 도산성(島山城) 전투의 전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 무태에 정착하였고, 159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행훈련원첨정을 역임하였다. 1606년 9월에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이 주관한 선사재(仙査齋) 강학에 참여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연경서원(硏經書院)을 방문하여 『심경(心經)』을 강의할 때 제자로서의 예를 올리고 문인이 되었다.

창포재는 1639년(인조 17) 구회신의 아들인 치암(癡庵) 구인계(具仁繼)[1607~1662]가 건립하였다. 현재 창포재 경내에 모선당(慕先堂), 사적비 3기, 모선당 건립 기념비, 연못·광장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위치]

창포재북구 서변동 1271에 있다.

[변천]

창포재는 1639년 건립되었으며, 1944년에 중건되었다. 2000년에 능성구씨 좌정승공파 문중에서 다시 중수하였다.

[형태]

창포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을 얹은 목조 와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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