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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53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구의 역사.

[광복에서 정부수립까지]

대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과제를 실현하여 나갔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집에서는 광복을 ‘세계 제일의 기쁨’으로 간주하며 즐거워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마자 좌우 연합으로 치안을 유지하며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여 나갔다.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위원회를 통한 좌우 연합은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이어졌고, 다시 1946년 6월 대구공동위원회로 이어져 광복 후 첫 3·1절과 8·15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거행하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을 둘러싸고 ‘신탁 반대’와 ‘절대 지지’로 나뉘고, 1946년 9월 총파업에 이은 10월항쟁이 일어나면서 좌우 갈등이 구조화하였다.

광복은 일제의 식민 지배와 전시 동원 체제에 의하여 억압되고 왜곡된 사회를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경제와 사회, 문화와 종교 그리고 체육 등 각 분야에서 자주성을 회복하였다. 대구는 1947년 4월 1일 경상북도령으로 일본식 정명을 버리고 우리 이름의 동명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의 실현은 좌우 갈등에 타격을 입고, 미소 냉전에 영향을 받아 좌절되면서 한반도 문제가 유엔에 이관되었다. 유엔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투표’가 결정되면서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구부를 폐지하고 광역시까지]

대구는 1949년에 「지방자치법」에 따라 1914년 일제가 정한 대구부를 폐지하고 대구시로 바꾸었다. 대구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때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79년에는 서울 다음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가 되었다. 대구는 1981년 7월 1일에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월배·성서·공산·칠곡·안심·고산 지역이 편입되었고, 면적은 2배 이상 넓어지고 인구는 대폭 증가하였다.

1982년에 대구의 축제인 제1회 달구벌축제가 개최되었으며, 1984년에는 88올림픽고속도로[광주대구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동서의 길이 열렸다. 대구는 1995년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광역시로 개칭되었고, 달성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여 더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대구는 1996년에 인구가 250만 명을 넘어섰다. 1998년에 진천에서 안심까지 대구도시철도 1호선 전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대구지하철 시대를 연 이래 2012년 9월에 2호선을, 2015년 4월에 3호선을 개통하였다. 대구가 2002년 월드컵 대회 경기, 2003년 8월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2011년 8월 제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우리나라는 3대 국제 스포츠를 모두 개최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다. 대구는 경제적으로 2008년에 경제자유구역을 지정되었고, 2009년에는 신서동 대구혁신도시 내에 첨단의료복합단지를 유치하였으며, 달성군 구지면 일원에 대구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였다.

[6·25전쟁에서 2·28 그리고 4·19까지]

대구는 6·25전쟁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1950년 7월 16일에 한국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로 이동하였고, 각급 학교 및 시설은 군 기관에 전용되었다. 대구에는 1·4후퇴 뒤 16만 8,000명의 피난민이 들어왔다. 학도호국단은 학도의용군을 편성하여 전장으로 나갔다. 대구는 인민군 비점령 지역으로 전화를 거의 입지 않았으나 도시 전체에 전쟁의 풍광이 짙게 드리웠다.

전쟁이 끝나고 대구의 수성천 변은 정치의 중심지로서 선거 때마다 10만 인파가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룬 곳이었다. 1954년 총선거, 1956년 정부통령 선거와 제2대 지방자치단체장선거, 1958년 5월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1958년 10월 최초의 대구시장 직접선거에서도 야당이 강세를 보여, 대구는 ‘전통 야당 도시’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대구는 노동운동에서도 1950년대 말 근대 민주주의적 노동운동이 시작된 곳이었다.

1960년 2월 28일에 대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쏟아져 나와 4·19로 가는 길을 열었다. 바로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2·28민주운동4·19혁명 시기에 대구의 민주·민족운동으로 계승되었다. 4·19혁명 시기에 대구는 민주운동과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컬러풀 대구와 파워풀 대구]

대구는 2000년 이후 도시 발전의 새로운 구상으로 대구의 정체성과 도시브랜드 제고 방안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구광역시는 2004년부터 19년간 "컬러풀 대구(Colorful Daegu)"를 사용해 오다가 민선8기에 들어 "파워풀 대구(powerful Daegu)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대구는 대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청년 주도의 미래지향적인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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