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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77
한자 大邱府水害問題市民大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 8월 13일연표보기 -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8월 13일 -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에서 대구수해대책위원회 구성
발생|시작 장소 만경관[현 롯데시네마 프리미엄만경]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547[종로1가 29-4]지도보기
성격 사고|사회운동

[정의]

1924년 대구의 서문시장대신동 일대의 홍수 피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린 시민대회.

[개설]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大邱府水害問題市民大會)는 1924년 여름 대구의 서문시장대신동 일대에 발생한 홍수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범시민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가운데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에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하여 열린 시민대회였다.

[역사적 배경]

1924년 7월 대구의 대표적 시장인 서문시장서문시장 일원의 대신동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서문시장은 1923년 천왕당지를 메우고 조성한 장터였는데, 잘못된 배수 처리 공사가 침수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대구 사회는 공사를 진행한 대구부에 대책 마련과 해결을 촉구하는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경과]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는 대구의 서문시장대신동의 홍수 피해에 따른 수해 복구와 원호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홍수 피해 직후 대구의 사회운동단체와 명망가들은 구호반 및 조사반을 만들어 자발적인 수해 복구 작업과 원호 활동에 나섰다. 또한 각 신문 지국은 공동명의로 ‘대구부민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선전문을 배포하여 수해 복구와 원호 활동에 동참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대구부 당국의 미온적 대처와 피해 규모를 축소하는 태도에 이재민들은 1924년 7월 29일에 이재민 대회를 열고, ‘간악한 대부구, 부민은 철저히 싸우라!’라는 구호 아래 대구부에 피해 복구비 지원과 하수도 및 도로 개선을 요구하였다. 대구 사회는 수해 피해의 해결을 촉구하는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를 1924년 8월 10일 만경관에서 열기로 하고 홍주일(洪宙一), 박해극(朴海克) 등을 준비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 개최에 앞서 준비 위원들은 선언문과 결의 사항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수해가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은 강조하고,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결의 사항은 대구 하천 개수 완성, 시가 정리비 예산 70만 원은 하수도 개선 공사와 조선인 주거지의 도로 개선에 투입할 것 등이었다.

[결과]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는 1924년 8월 13일 만경관에서 열렸고 대구수해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대구부 예산의 시가 정리비 70만 원을 홍수 피해 복구와 조선인 주거지의 도로 개선에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인 사회와 조선인 유지 일부의 반대에 부딪혔고 위원들이 탈퇴하면서 동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실제 시가 정리비 70만 원의 예산이 피해 복구에 투입되지 않아 수해 이재민과 대구수해대책위원회가 원하던 방안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는 대구의 서문시장대신동에서 발생한 홍수 피해의 대책을 세우기 위한 범시민적 차원의 시민대회였다.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에서 대구수해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수해 이재민과 대구부의 조선인 주거지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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