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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공동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31
한자 大邱共同委員會
이칭/별칭 대구지방회,대구좌우합작촉성회,대구좌우합작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6년 6월 28일연표보기 - 대구공동위원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6년 10월항쟁 이후 - 대구공동위원회 와해
최초 설립지 경상북도청 도공보과 제2회의실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지도보기
성격 정치 단체

[정의]

1946년 6월 대구광역시에서 설립된 좌우익 상설 합작 기구.

[설립 목적]

대구공동위원회(大邱共同委員會)는 대구 지역의 좌우익 정치세력이 협력하여 식량 문제를 비롯한 지역 현안을 공동으로 해결하고 대책을 마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46년 6월 28일 설립된 대구공동위원회는 1946년 10월 ‘10월항쟁’이 발생하면서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공동위원회는 1946년 6월 28일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있던 경상북도청 도공보과 제2회의실에서 설립되었는데 대구지방회, 대구좌우합작촉성회, 대구좌우합작회라고도 하였다. 대구공동위원회는 좌익의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우익의 한국민주당한국독립당 등 지역의 대표적 좌우세력인 네 개 정당의 5인 대표로 구성된 좌우합작 기구였다.

각 당의 5인 대표는 조선공산당 이상훈·황태성·신철수·이선장·손기채, 조선인민당 최문식·홍승만·백현국·이재복·김상흔, 한국민주당 백남규·엄성문·김태희·이원만·김재권, 한국독립당 김훈채·공원상·임상조·김영옥·김도원이다. 대구공동위원회는 위원회 내에 민생, 문화, 산업 경제 등 3개 대책 전문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대구공동위원회는 1946년 6월 29일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테러 방지 및 미국 독립기념일 기념행사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 식량 및 하곡(夏穀) 수집에 협력하는 방침과 수집 계획량의 공정화를 촉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제3호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대구공동위원회는 1946년 8·15기념식을 공동으로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대구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조선독립경북촉진회의 참여 아래 ‘8·15기념행사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8·15기념행사준비위원회달성공원 내에 있는 대구신사의 석등·신전·조거 제거, 대명동 충령탑 등 대구 지역의 일제 잔재 소탕에 행사의 초점을 두었다. 8·15기념식은 최문식[조선인민당]의 개회로 시작되어 김하정[조선독립경북촉진회]의 개회사, 이상훈[조선공산당], 경상북도 도지사 김의균 등의 기념사로 진행되었다. 기념식에서는 일제 잔재 소탕의 한 장면으로 대구청년동맹 위원장 정문택(鄭文澤)이 유족 대표로 대명동 충령탑을 파괴하는 점화를 하였다.

대구공동위원회는 좌익이 주도하는 대구 9월총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1946년 9월 24일 제6회 회합을 개최하여 조직 문제를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12월 31일까지 현 대구공동위원회를 유지하고, 1947년부터 상설 기관으로 발전시킬 것에 합의한 뒤 8명의 준비 위원을 선정하였다. 또 친일 민족 반역자를 소탕하기 위한 8명의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1946년 10월항쟁이 발생하면서 좌우 세력의 신뢰가 무너지고 미군정이 좌파 세력을 탄압하면서 대구공동위원회는 와해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공동위원회는 대구 지역 좌우합작 기구로 중앙에서 이루어진 중도파의 통일전선이 아니라 조선공산당한국민주당이 모두 참여하는 실질적인 좌우합작이었다. 대구공동위원회는 지역의 현안을 공동으로 해결하고 대책을 마련하면서 자치의 의미를 확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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