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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34
한자 孫基採
영어공식명칭 Son Kich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28년 5월 - 손기채 대구청년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손기채 밀양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6월 16일 - 손기채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손기채 조선중앙일보사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3월 5일 - 손기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 부의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7월 28일 - 손기채 10월항쟁으로 징역 1년형 언도
출생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 부의장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손기채(孫基採)[?~?]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10월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손기채는 1927년 6월 30일 대구노동공제회 회관에서 열린 대구 지역 소년단체 합동 간부회에 참석하여 단일 소년회를 조직하자는 논의에 찬성하고 합동준비위원과 선언 및 강령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합동 간부회에 참석한 대구소년혁영회·소년개조단노동소년회·대구소년회 등 3개 단체는 대구소년동맹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1928년 5월 무렵에는 대구청년동맹에 가입하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손기채는 1929년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에서 밀양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신간회 밀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밀양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손기채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30년 6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폭력 및 취체 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다.

손기채는 1930년 『경북공론』이라는 일문판 잡지를 창간하였고, 조선중앙일보사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이선장·송기찬 등과 함께 대구의 조선인 기자단체인 칠조회(七鳥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손기채는 1935년 9월 교남학교의 재정난에 도움을 주고자 기부금을 내기도 하였다.

손기채는 광복 후 조선공산당 대구시위원회의 지도부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5일 대구공회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6월에는 대구의 좌우합작 단체인 대구공동위원회조선공산당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식량문제 등 대구의 현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손기채는 1946년 10월 2일 발생한 10월항쟁 때 협상단이 일원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미군정 당국과 협상을 벌였으며, 10월 3일 항쟁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제5관구경찰청에 연행되었다. 손기채는 1947년 7월 28일 「군사법령 제19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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