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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락연구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81
한자 經絡硏究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71년 9월연표보기 - 경락연구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74년 3월연표보기 - 경락연구회 해체
최초 설립지 청진여관 - 서울특별시 종로1가 청진동
성격 단체

[정의]

1971년 9월 대구광역시에서 대구매일신문사 기자가 조직한 민주화운동 단체.

[설립 목적]

1969년 3선개헌(三選改憲) 이후 장기 집권을 표면화한 박정희 정부가 대중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높이면서 민중을 각성시키고 민중 역량을 육성하여 대중운동을 이끌고 나갈 지도부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경락연구회(經絡硏究會)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끌어 갈 간부 양성과 지도부의 필요성에 의하여 결성되었다. 한방의학을 방편으로 합법적인 모임을 가장할 수 있어 조직 명칭을 ‘경락연구회’로 정하였다.

[변천]

대구의 서도원(徐道源)[대구매일신문사 기자], 부산의 이영식, 광주의 김세원, 서울의 우홍선·이수병은 1971년 9월 서울특별시 종로1가 청진동의 청진여관에서 경락연구회를 결성하고, 서도원을 좌장으로 뽑았다. 박정희 정부의 대중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탄압이 심하였던 시기이기 때문에 경락연구회는 형식도 갖추지 않고 물증도 남기지 않는 점조직 방식으로 은밀하게 운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락연구회는 전국적인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을 통일운동과 사회변혁 운동으로 이어 가고자 각 지역의 핵심 활동가들이 모여 결성되었다. 경락연구회는 지역별로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우홍선은 서울, 서도원은 대구, 김세원은 광주, 이영석은 부산의 조직을 맡아 지역 활동가들을 규합하였고 이수병은 학원과 문화계를 맡아 대중운동의 결합을 모색하였다. 경락연구회는 하부 조직으로 각 지역에 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을 구성하였다. 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은 민족자연건강연구회라는 합법적 단체의 명칭으로 운영되었다.

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의 활동은 철저하게 3불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3불 원칙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불문(不文)], 조직에 관한 불필요한 말을 하지않는다[불언(不言)], 기구·개인 명칭을 쓰지 않는다[불명(不名)]이었다. 경락연구회는 전체 회의는 연 2회, 2인 회의는 연 12회, 3인 회의는 연 4회의 모임을 가졌다. 경락연구회 회원들은 1972년에는 한방의학 서적의 번역 사업을 하거나 1973년에는 직접 ‘경락연구소’라는 지압 시술소를 서울에서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모임을 개최하고 조직을 유지하였다.

1974년 3월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서도원·우홍선·이수병이 체포되면서 경락연구회는 해체되었고 서도원·우홍선·이수병도예종·송상진·하재완·김용원·여정남과 함께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다음 날인 4월 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현황]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는 1993년 이후 매년 4월 9일을 전후하여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산화한 서도원·도예종·여정남 등 4·9인혁열사의 추모제를 경상북도 칠곡군 현대공원에서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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