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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23
한자 兩班家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재두

[정의]

대구 지역에서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들이 살던 집.

[개설]

조선시대 대구 지역에는 소수의 지배층인 양반과 다수인 평민 및 노비가 살았다. 신분이나 경제력에 따라 수십 칸의 기와집에서부터 2~3칸의 초가집[초옥] 등에서 거주하였다. 주재료가 목재나 흙이었기 때문에 내구연한이 수십 년에서 몇백 년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시멘트 등 새로운 건축 소재들이 사용되고, 양옥과 아파트 보급이 확산되면서 초가집은 아주 드물어졌으며, 백 년 이상된 기와집도 소수만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기와집에 산 경우도 있었지만, 초가집에 산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흔히 한옥이라고 생각하는, 기와를 얹은 양반가옥은 일부 소수의 부유한 양반들이 살던 가옥이다.

[변천]

대구 지역에는 달성군 현풍읍한훤고택, 동구 둔산동백불고택, 달성군 화원읍남평문씨 본리세거지 등이 양반가옥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한훤고택은 조선 초기 소학 실천에 앞장서다가 연산군에게 희생되었고 문묘에 배향된 김굉필의 후손가이며, 백불고택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후손가이다.

[백불고택]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경주 최씨 종가인 백불고택(百弗古宅)은 현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양반가옥이다. 안채인 정침(正寢)은 1694년(숙종 20)에 처음 지은 것이며, 사랑채는 1905년(고종 42)에 중건한 것이다. 정침 동쪽에는 1742년(영조 18)에 지은 보본당(報本堂)이 있으며, 보본당 뒤편에는 1896년에 건립한 가묘(家廟)와 별묘(別廟)가 있다. 정침은 가운데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방과 부엌 곳간 등이 쪽마루로 연이어져 있는 ‘ㄷ’ 형태로서, 일자형의 사랑채와 함께 큰 입 구(口) 자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口자형의 집은 협소한 대지에 최대한 복합적인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어, 중부지방 및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연한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백불고택의 가묘·별묘·보본당으로 이루어진 경(敬)의 공간은 뒷산 대암(臺巖)을 정점으로 보본당과 직선상에 입향조 대암 최동집(崔東㠍)을 모신 별묘를 배치하여 유학적 교훈이 공간 질서로 나타나도록 하였다. 즉, ‘보본당’이라고 하는 유교적 실천 공간에서 비롯된 경외심이 별묘를 매개로 대암까지 연결됨으로써 내세 공간[선조]과 현세 공간[후손]이 서로 관념적으로 상통하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달성 서씨 한옥]

대구광역시 중구와 시 외곽에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한옥들 중에 20세기 이전 가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구광역시 중구 진골목의 한옥들은 1900년을 전후하여 당대의 부호 서병국 등 달성서씨 일가의 집들로 조성되었다. 유사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 주택을 조영하면서도 건축 유형이 다채롭다. 1911년 당시 대구 중구 종로2가 66번지의 서병원 저택 부지는 1933년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이 매입하여 살기도 하였다. 그 부지는 현재 종로숯불갈비와 진골목식당, 미도다방 일대를 아우르는 대형 필지였다. 종로숯불갈비는 공(工) 자형의 한옥으로 외관은 고급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진골목식당은 원래 서병원 저택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붕의 면적이 대단히 넓어 통상적인 한옥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큰 공간을 덮기 위하여 지붕의 구조는 꽤 복잡한 방법을 택하였다. 전체적으로 3량의 두 축이 기역(ㄱ) 자형으로 만나도록 한 다음, 꺾음부로부터 마당을 향하여 5량의 거대 지붕을 얹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통상의 5량 지붕보다는 훨씬 크고 높은 특징이 있다. 종도리 아래쪽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가로 부재(部材)를 더 걸어 대청부의 구조를 보강하였으며, 이 때문에 기둥열이 복잡한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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