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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20세기 전반기 여성 판소리 명창의 요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76
한자 大邱 20世紀 前半期 女性 - 名唱- 搖籃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정의]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대구 지역 여성 판소리 명창에 대한 이야기.

[대구 지역은 판소리 불모지인가?]

대구광역시는 오랫동안 판소리 불모지로 알려져 왔는데 과연 사실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대구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1601년(선조 34)에 경상감영이 안동시에서 대구광역시로 옮겨 왔다. 이로부터 대구광역시는 경상도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고, 경상도의 문화와 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거점이 되었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조선 후기 대구 지역에 판소리문화가 성행하였음을 알려 주는 송흥록과 고수관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대구광역시의 일등 명기 맹렬이, 송흥록이 경상감영 선화당에서 부르는 판소리를 듣고서 “그대가 비록 명창이지만 아직도 미진한 대목이 있다”라며 일침을 가하였다. 이에 송흥록은 고향인 운봉 비전으로 돌아가 폭포 밑에서 석 달 동안 서너 동이의 검붉은 피를 토한 끝에 득음하였고, 다시 경상감영 선화당에서 소리하여 맹렬로부터 인정을 받고, 함께 운봉에 가서 살았다. 고수관도 경상감사 도임을 축하는 잔치에서 「춘향가」의 ‘기생점고’ 대목을 부르며 기생 이름을 그 자리에 참석한 기생들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설을 붙여 바꿔 불러 좌석을 경탄케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한 명창도 경상감영선화당에서 소리하여 명창으로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서울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대구 지역은 판소리문화가 융성하였다. 그래서 판소리 창단에는 ‘전라도에서 공부해서 경상도에서 닦아서 서울에 와서 명창 된다’라는 말이 있었다.

20세기 전반기에 박기홍 명창을 비롯하여 조학진, 염덕준, 박지홍, 박동진 등 이름난 명창들이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여류명창으로 강소춘을 비롯하여 김초향과 김소향, 김추월, 김해 김록주, 신금홍, 박록주, 박귀희 등은 대구 지역에서 배출하거나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며 판소리문화를 살찌우고 예원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대구지역의 기생조합과 권번]

대구 지역에서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일제강점기에도 다양한 판소리창극 공연이 열렸다. 조선 후기에 경상감영 등에서 송흥록이나 고수관 등 당대를 울리던 명창들을 불러 판소리를 듣고 즐겼다. 일제강점기에도 판소리창극 공연이 자주 개최되었는데, 김여란은 1929년 대구극장에서 데뷔 공연을 하였고, 1932년 2월에 김창환·정정렬·한성준 등 전통예술계 원로들이 조선 음률을 부활시킬 목적으로 창립한 조선정악회(朝鮮樂正會)의 발대식을 대구공회당에서 한 것도 대구 지역이 판소리계에서 가지는 위상을 입증하고 있다.

대구 지역은 철성으로 쇠망치를 내려치듯 소리를 끊어내는 동편제를 선호하였다. 임방울 명창이 대구의 어느 부호 집 잔치에 초청되었을 때의 일화이다. 단가 「편시춘」으로 목을 풀기 시작하자 주인이 소리를 그치게 하며 “단가에 질질 짜는 계면이 뭐꼬? 그게 단간가?”라고 질책하고, “어릴 적에 박기홍 명창의 소리를 들었는데 단가만 들어도 씩씩한 성음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라며 “단가는 그만두고 판소리나 듣자”라고 하였다. 임방울은 소리를 못 하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판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교방은 전통예술이 전승되고 꽃을 피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구에는 경상감영대구부에 각각 교방이 있었다. 교방에 소속된 관기의 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대구읍지(大邱邑誌)』[1768]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에 41명, 대구부 교방에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남읍지(嶺南邑誌)』[1871]에는 경상감영 교방에 35명, 대구부 교방에 31명이 있었으며,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의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에는 경상감영 교방에 21명, 대구부 교방에 17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899]에 의하면 1895년에 대구 지역에 교방이 폐지되었다고 한다. 관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혁파되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관기의 신분 해방은 명목상일 뿐이고 관기들은 여전히 관에 예속된 상태로 있었다.

20세기의 전통예술은 기생조합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기생조합권번은 일제강점기에 전통예술의 요람이었다. 1907년 11월 관기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자 서울의 관기 출신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예 학습도 할 수 있는 기생조합을 만들기로 하였다. 1908년 9월에 기생단속령이 반포되었으며, 1909년 9월에 최초의 기생조합인 한성예기조합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미와 조테츠[三輪如鐵]의 『대구일반』에 의하면, 대구에 관기가 실질적으로 없어진 것은 박중양이 대구군수로 부임한 1906년 7월이라고 한다. 이때 경상감영대구부에 소속되어 있던 200명 전후의 서기와 하인, 관기를 모두 없앴다.

대구의 기생들도 1910년 5월 무렵 기생조합소를 설립하고 김명계를 초빙하여 일어를 배우는 한편 매주 토요일마다 시국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1912년 2월 당시 130명의 기생이 소속되어 있었다.

1913년 2월에는 41명의 기생이 서울에서 인가받은 조합과 동일한 규약으로 기생조합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오야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의 『조선미인보감』에 의하면 1918년 당시 소속 기생은 32명이었다. 1922년 1월 당시 취체(取締)는 염농산이고 부취체는 박우춘, 총무는 엄주상, 간사는 상설매와 김록주였다.

1920년대 대구에는 관허 권번으로 조선인 권번인 달성권번과 일본인 권번인 대구권번이 있었으며, 제일교회 뒤편 발방아골목, 교동시장 안, 옛 한국전력지점 앞, 동성로 제일은행 건너편 등에 사설권번이 있었다. 1914년부터 기생조합은 일본식 명칭인 ‘권번’으로 바뀌게 되는데, 서울의 광교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기생조합은 대정권번으로 바뀌었다. 대구기생조합도 1926년에 대구 경찰 당국이 조합을 해체하고 ‘권번’으로 새로 출발하라고 하여, 1927년 1월 6일에 자본금 6,000원으로 합자회사 달성권번으로 바뀌었고, 1월 26일에 개업식을 하였다. 권번장은 염농산이었다. 1928년 10월 당시 74명이 기적에 올라 있고, 노름을 가는 기생은 50명이었다. 달성권번에는 김해 김록주가 1928년 1월 요절하기 전에 소리선생으로 있었으며, 신금홍김록주 사후에 소리선생으로 있었다. 박지홍도 해방 때까지 달성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6년 1월에 대동권번이 동본정 67번지[현 교동시장]에 설립되어 창극조와 춤, 시조, 풍류, 가야금병창 등을 가르쳤다. 당시 대동권번의 임원은 회장 김애산, 부회장 정남정, 평의원 이춘정, 간사 전명득, 학예부장 박지홍, 사범 방호준·박동진, 총무 조병규였다.

[대구 지역의 판소리 명창들]

20세기에 들어오면 대구 지역은 판소리의 소비지일 뿐만 아니라 대구기생조합달성권번 등에서 명창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1) 대구 지역의 판소리 명창들

20세기 전반기에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판소리 명창은 다음과 같다.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판소리 명창들은 기생조합이나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소리와 춤 등을 가르쳤다.

박기홍[?~1927?]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동편제의 법통을 끝까지 지켰다. 미리 소리금을 정하고 소리할 정도로 기량과 자부심이 대단하였으며, 가신(歌神), 가선(歌仙)으로 칭송받았다. 경상북도 선산의 도리사 부근에서 박록주를 가르쳤고, 그 후 대구기생조합에서 소리선생도 하였다. 「춘향가」와 「적벽가」에 뛰어났으며, 특히 「적벽가」의 ‘삼고초려’, ‘장판교대전’, ‘화용도’에 신출귀몰하였다.

염덕준[1865~?]은 전라북도 전주 출신의 서편제 명창으로 고종·순종 대에 활동하였다. 원각사 시절에 김창환과 송만갑 등과 함께 창극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원각사가 해산된 후 대구에서 여생을 보냈다. 「춘향가」와 「심청가」가 장기이고, 특히 ‘심청이 인당수로 가는 대목’에 뛰어났다.

조학진[1877~1951]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동편제 법통을 계승하고,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다. 1930년대부터 대구에 거주하면서 권번 등에서 소리선생으로 있었는데, 박동진박귀희를 가르쳤다. 장기는 「춘향가」와 「적벽가」였다.

박지홍[1884~1958]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의 서편제 명창으로 한때 원각사에서 활동하였으며, 평양을 비롯하여 해주와 개성, 함흥, 경주 등지의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하였다. 1929년부터 달성권번에서 소리와 춤을 가르쳤고, 1946년 1월부터 이삼 년 동안 대동권번의 학예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경북국악원을 창설하여 대구의 전통예술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강태홍[1893~1957]은 전라남도 무안의 예인 집안 출신으로 가야금의 명인이다. 달성권번과 경주권번, 울산권번, 동래권번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제자를 육성하였다. 이소향, 최금란, 박귀희 등이 강태홍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고, 전통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승무·입춤·수건춤 등을 전수하였으며, 양금·해금·피리 등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박동진[1916~2003]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김천, 경주, 대구 등지의 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하였고, 1946년에는 대동권번에 소리사범으로 있었다.

2) 대구 지역의 판소리 여류명창들

20세기 전반기에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판소리 여류명창들은 다음과 같다.

강소춘[?~?]은 대구 출신으로 고종 때 협률사 지방순회 공연 시 춘향 역과 심청 역으로 이름을 얻었다. 고제소리를 하였으며, 웨장목의 성량은 남창을 압도할 만하였다. 「춘향가」의 ‘사랑가’와 ‘이별가’, ‘망부사’ 등에 뛰어났다.

김추월[1897~1933]은 대구 출신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소리공부를 하였고, 상경하여 대정권번·한성권번에 기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춘향가」에 뛰어났으며, 고음반에 ‘조조 군사 사향가’, 「춘향가」의 ‘이별가’ 등이 남아 있다.

김해 김록주[1898~1928, 본명 김임전]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어릴 때 소리꾼인 아버지 김수룡에게 배운 후 김정문과 송만갑의 지도를 받아 이름을 날렸다. 1920년대 초에 대구기생조합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에 달성권번에서 소리선생을 하였다. 「춘향가」에 뛰어났으며, 더늠으로 「춘향가」의 ‘사랑가’와 ‘어사또 춘향 문전 당도’를 남겼다.

김초향[1900~1983]은 대구 출신으로 12세부터 대구기생조합에서 배웠으며, 14세에 서울로 올라가 김창환과 송만갑의 지침을 받고 광무대와 장안사에서 활동하였다. 16세 때에 한동안 대구기생조합에 기적을 두었으며, 20세 때 다시 상경하여 대정권번에 기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정정렬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하여 일가를 이루었고, 조선성악연구회 설립에 일조하였다. 장기는 「흥보가」이며, 특히 「춘향가」의 ‘이별가’와 「심청가」의 ‘범피중류’ 등에 뛰어났다.

박록주[1905~1979]는 경상북도 선산 출신으로 어릴 때 아버지 박재보에게 소리를 배웠다. 12세 때 동편제 거장 박기홍에게 「춘향가」 전 바탕과 「심청가」 일부를 배웠으며, 1919년에 대구기생조합에서 기생수업을 하였다. 1923년에 상경하여 송만갑에게 「춘향가」를 배웠으며 한남권번에 기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김정문을 비롯하여 송만갑과 정정렬, 유성준 등에게 두루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여성국악동호회와 판소리보존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장기는 「흥보가」와 「춘향가」였고, 특히 ‘제비노정기’와 ‘비단타령’에 뛰어났다.

신금홍[1906~1943?]은 경상남도 함양 출신으로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웠다. 1930년대 초반에 달성권번의 소리선생을 하였고, 그 후 상경하여 한성권번에 기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춘향가」의 ‘십장가’와 「심청가」의 ‘심청 자탄하는데’ 그리고 남도민요 「육자배기」에 뛰어났다.

임소향[1918~1978]은 경상북도 김천 출신으로 달성권번에서 소리수업을 받았고, 1930년대에 정정렬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창극좌와 화랑창극단, 한양창극단, 조선창극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대동권번에서 활동하였다.

박귀희[1921~1993]는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병창 명인이다. 11세 무렵 대구에서 손광재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그 후 박지홍조학진, 박동실, 유성준, 박록주 등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가야금병창은 1935년에 강태홍에게 배우고, 1941년에 오태석에게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동가극단과 한양창극단, 동일창극단에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여성국악동호회와 여성국극동지사에서 여성국극 배우로서 주목받았다. ‘사랑가’, ‘제비노정기’, ‘조자룡 활 쏘는 데’ 등에 뛰어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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