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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50
한자 大邱- 宗敎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린 종교인과 동반성장한 종교 단체들.

[개설]

대구광역시의 여러 종교 기관들이 지닌 인적·물적 기반들은 지역 사회의 연대를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대구에 뿌리내린 종교 기관들이 대구 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하는 바는 앞으로도 클 것이다.

[대구 종교의 흐름]

산신에게 제를 올렸던 흔적과 기록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구 지역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본고장으로 기능하였다. 우선 샤머니즘을 비롯한 토속적인 원시 신앙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가 번성한 지역이다. 조선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영남학파의 본고장이며, 조선 후기에는 동학사상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개화기 이후 서구의 종교 유입이 급속히 확산하였다. 천주교는 서울과 함께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었기에 남부 지역을 관장하였으며, 개신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1895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것에서부터 종교적인 세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교파가 확산된 가운데 대구광역시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하는 종교 단체들이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불심으로 지킨 대구: 대구의 불교문화]

유럽의 명소들이 커다란 성당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듯이,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를 이야기할 때 사찰을 빼 놓고 거론하기는 어렵다. 불교는 단순한 신앙 행위를 넘어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이 담긴 문화유산이며 유구한 세월 동안 동경심을 끄는 대상이었다. 대구·경북 지역의 불교 인구 비율은 전국 평균인 23.2%보다 무려 10% 이상 높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경북 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장소로서 기능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도 한국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보로 지정된 불교문화재 58점 가운데 대구·경북 지역에 있는 국보는 23점으로 40%에 육박한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이 가운데 국보 금동여래입상, 국보 금동보살입상, 국보 금동보살입상을 소장하고 있다.

대한불교진흥원의 『한국불교총람』에 따르면 대구·경북 지역의 조계종 사찰의 수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의 제9교구 본사 동화사를 포함하여 5곳의 조계종 본사가 2,000여 곳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태고종, 천태종, 법화종, 관음종, 진각종 등을 합하면 사찰의 수는 4,000여 곳을 넘어선다.

최근 사찰 관광의 한 측면으로 템플스테이 체험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사찰에서 하는 수련회를 통하여 불자 입장에서는 불교 교육과 신심 고취를 이룰 수 있고, 사찰 입장에서는 대중과 함께하는 열린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서 세간의 평이 대체로 긍정적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 사찰들이 대부분 깊은 산중에 있다는 인식은 최근에 와서 줄어들고 있다. 가령 한국불교대학대관음사는 대구·경북 지역을 대표하는 도심 속 포교당이 되었다. 1992년, 우학 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한국불교대학대관음사는 사찰의 이름으로는 다소 긴 편이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비친다. 현대적 교육 기법을 도입하여 신도를 교육함으로써 확장성을 가졌는데 경주시 감포읍, 경산시와 자인면,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지역, 구미시 등으로 도량을 넓혀 나갔으며 심지어 국외에 미국 뉴욕과 중국 칭다오에도 분원이 있을 정도이다. 한국불교대학대관음사는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고, 사찰 내에 사진관, 탁아방, 노래방, 상담소, 시민선방 등이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다. 불교의 근본정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고 볼 때 대구광역시의 불교문화가 새로워지는 것은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대구: 대구의 천주교 문화]

대구광역시에는 천주교의 성지가 있는데 중구의 남산동 가톨릭타운이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 남산역 1번 출구, 또는 대구도시철도 1호선 명덕역 4번 출구에서 조금만 걸으면 천주교대구대교구청 입구가 보인다. 1914년 프랑스인 선교사가 세운 성유스티노신학교, 천주교대구대교구청, 성모당,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성김대건기념관, 성직자 묘역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있기에 ‘가톨릭타운’이라 불린다. 붉은 벽돌 건물을 향하여 나 있는 호젓한 산책로를 걷다 보면, 속세에서 성지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시민들도 가톨릭타운을 찾아가 종교를 넘어선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성유스티노신학교는 명동성당을 만든 프와넬 신부의 계획 아래 축조되었으며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혼재하여 만든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이었던 고 김수환(金壽煥)[1922~2009] 스테파노 추기경의 흔적도 남아 있어 일반인들도 자주 찾는다.

1911년, 천주교는 남쪽을 관할할 새로운 교구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대구의 큰 부자가 땅을 희사한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徐相敦) 선생이 남산동 종묘원을 대구교구에 기증한 것이다. 서상돈의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도였는데, 백부와 숙부가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순교할 정도였다. 초대 대구교구장이 된 드망즈 주교는 대구에 천주교가 온전히 뿌리내리게 하기 위하여 더 큰 염원을 담아 기도한다. 주교관과 신학교, 주교좌성당을 증축하게 해 달라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었는데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동굴과 닮은 성모당을 지어 바치겠다는 맹세와 함께였다. 기적적으로 1913년 주교관이 완공되고, 1914년 성유스티노신학교가 완공되었으며, 1918년에는 주교좌계산성당이 증축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식 이름 ‘안세화’라고도 불린 드망즈 주교는 세 가지 기도가 모두 이루어진 직후 맹세하였던 대로 거대한 동굴로 이루어진 성모당을 지었다.

성모당은 적색과 흑색 벽돌, 그리고 화강암으로 쌓아 올려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성모당의 동굴 윗면에는 ‘1911 EX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이라고 쓰여 있는데, 1911은 대구교구가 처음 생긴 해를 가리키고, 1918은 주교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그리고 가운데 문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과의 약속대로’라는 뜻이다. 대구의 성모당은 이후 시민들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가령 시인 이상화(李相和)성모당을 배경으로 「나의 침실로」를 집필하였고,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가 매일 기도를 올린 곳도 성모당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구를 방문하였을 때 찾은 곳도 성모당이다. 1990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병자들의 병을 낫게 하여 준다고 소문이 나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500m 떨어진 곳에는 관덕정순교기념관이 있는데 천주교 신자를 처형한 천주교 성지이다. 원래는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으로 쓰였지만 천주교인 17명이 관덕정[관덕당]에서 처형당하였다.

대구는 조선에서 비교적 일찍 천주교가 보급된 도시였다. 대구광역시의 최고 번화가인 반월당을 지나 계산오거리에 서면 이국적인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경상도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뾰족한 첨탑과 아치형 창, 프랑스에서 온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이 유독 아름다운 공간이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 이후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로베르 신부는 경상도 전역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러다 1897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1902년에 고딕양식의 성당을 지었는데 설계는 로베르 신부가 하고 중국에서 건너온 기술자들이 공사를 맡았다. 지금도 성당의 정원에는 로베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1911년 ‘대구교구주교좌성당’으로 승격한 계산성당은 경상도 천주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8년에는 증축도 하였다. 입구에 두 개의 종탑이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울 명동성당과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지어진 고딕양식 성당인 계산성당은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며 현재 국가 지정 사적지로 보호받고 있다. 또한 근대문화골목에 포함되어 대구광역시 중구의 대표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계산성당은 멀리서 봐야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는데 3·1만세운동길 90계단에 올라서 동쪽 방향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조화로운 풍경인지 깨닫게 된다. 계산성당김수환 추기경이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기도 한데, 김수환 추기경은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대구의 대표적인 화가 이인성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계산성당 앞의 감나무는 또 하나의 포토존이 되고 있다.

[선교사가 사랑한 대구: 대구의 개신교 문화]

우리나라 개신교의 교세 성장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개신교에서는 대구광역시를 지칭하여 ‘남한의 예루살렘’이라 부른다. 대구가 성지 예루살렘처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으며, 무엇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기독교총연합회에 따르면 대구광역시의 개신교 교단 수는 16개 교단이며, 교회 수는 1,500여 개로 추정하고, 교인 수는 대구 인구의 12~15% 내외로 잠정하고 있다. 개신교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미국 내 기독교 각 교파가 본격적으로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선교사들은 대구 근대화의 숨은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대구·경북 지역의 개신교 전파는 1891년 우리나라에 온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목사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 이름 ‘배위량’을 얻은 베어드 목사는 부산에 도착하여 우리말 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893년(고종 30) 4월 22일 약령시가 열리던 대구의 약전골목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준 것을 계기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대구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고 정착하기로 마음먹는다. 부산을 떠나 대구로 온 베어드 목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대구읍성의 남문 안 땅 1,388㎡와 초가 5채, 기와집 4채를 매입하여 남성정교회를 세웠다. 남성정교회의 후신이 바로 대구제일교회이다. 1981년 증축 공사를 하였지만 신도 수가 날로 늘어 결국 1994년 청라언덕 동쪽에 대지를 매입하여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새로운 대구제일교회는 언덕 위에서 옛 제일교회를 내려다보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인 대구제일교회는 베어드 목사가 약전골목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던 1893년 4월 22일을 교회 창립일로 삼고 있다. 이후 베어드 목사는 1895년 11월 북장로교 대구지부를 개설하였으며, 1896년 4월에는 대구 선교부로 부임하였고, 1896년 12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 교육 담당 고문으로 임명받아 서울로 떠났다.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의 처남인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가 부임하도록 하여 뒷일을 도모하였다.

제임스 아담스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Johnson), 헨리 브루엔(Henry Bruen)과 함께 선교지부를 개설하였다. 존슨은 의사였기에 자연스럽게 ‘의료’를 주요한 선교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1899년 존슨은 현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옛 제일교회] 자리에 ‘미국 약방’을 개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하면서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대구·경북 지역에 최초로 서양 의술을 소개하는데, 대구 제중원은 1903년 동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제2대 원장 아치볼드 플레처(Archibald Fletcher) 박사가 ‘동산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바로 현 동산의료원의 전신이다. 동산의료원은 그 뒤 1941년에는 일본경찰병원, 6·25전쟁 중에는 국립경찰병원으로 사용되는 등 대구 역사의 흐름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대구 시민들에게 종교가 끼친 영향]

대구광역시에 사과가 보급된 것과 관련한 두 가지 설이 있다. 존슨 선교사가 미주리주에서 묘목으로 처음 수입하여 선교부 뜰 안에 심었다는 것과, 아담스 선교사가 캔자스주에서 접가지 나무로 처음 수입하고 재래종인 능금나무에 접목하여 교인들에게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두 선교사가 한국에 사과를 들여온 배경에는 이미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과실나무를 현지 교인들에게 보급하면서 선교 효과를 얻었다는 선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존슨 선교사와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선교부 한 울타리 안에 각기 사과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동산의료원에는 존슨이 가져온 나무의 2세목과 접목으로 육성한 후계목이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에서 활동 중인 개신교의 대표 시민 단체로 대구YMCA를 들 수 있다. 대구YMCA는 1996년부터 담장 허물기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웃과 마음의 문을 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시민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번져 나가 2002년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2004년 11월에는 제1회 대한민국 지역혁신박람회에서 우수 사례로 선정되었으며, 중국 선양 등에서 모범 사례로 배워 가기도 하였다. 그간 종교시설들이 속세와 일정 거리를 두는 것을 미덕으로 삼은 데에 비하여 대구YMCA의 담장 허물기 운동은 닫힌 종교시설이 열린 종교시설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평강교회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대명천주교회 등이 담장 허물기에 빠르게 동참하였다.

대구·경북 지역의 대학 교육시설 중에는 종교 기관에서 설립한 경우가 많다. 천주교의 대구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상지대학교, 개신교의 계명대학교, 불교의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와 위덕대학교, 유교의 영주 동양대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1900년 11월 11일에는 아담스 선교사가 희도학교를 세웠는데, 희도학교는 대구 근대 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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