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87
한자 嶺南第一關
영어공식명칭 Yeongnam jeilgwan
이칭/별칭 남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9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736년연표보기 - 영남제일관 건립
훼손 시기/일시 1906년 - 영남제일관 해체
이전 시기/일시 1980년 - 영남제일관 망우공원에 중건
현 소재지 영남제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산90]지도보기
원소재지 영남제일관[대구읍성 남문]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035[동산동 357]지도보기
성격 성문
양식 익공계|겹처마|팔작지붕
관련 인물 민응수|박중양
크기(높이,길이,둘레) 23m[높이]|8m[성벽 높이]|9m[성벽 폭]|52m[성벽 길이]
면적 약 197㎡[59.8평]
소유자 대구광역시
관리자 대구광역시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대구읍성의 남쪽 성문.

[개설]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부사 민응수(閔應洙)[1684~1750]가 1736년(영조 12) 축성한 대구읍성의 남쪽 성문이다. 대구토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여 석성(石城)으로 축성하면서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세웠는데, 남문의 다른 이름이 ‘영남제일관’이다. 영남제일관은 1906년 대구읍성과 함께 해체되었고, 1980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중건되었다.

[건립 경위]

민응수는 “부산 동래에서 대구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입로에 대비할 만한 축성이 한 군데도 없으니 만일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임진왜란이나 정유왜란처럼 온 나라가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장계를 올렸다. 이후 1736년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대구읍성을 석성으로 축성하게 되었다. 이후 친일파 관찰사 서리 박중양(朴重陽)[1874~1959]이 일제의 요구에 따라 1906년 대구읍성을 허무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위치]

대구읍성의 남문은 현재 남성로 홍백원 자리로 추정되며, 복원한 영남제일관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90번지에 있다.

[형태]

1980년 복원된 영남제일관은 중충문루[중층문루]에 팔작지붕을 얹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되살리고 철근콘크리트로 현대적 감각을 살린 높이 23m, 연건평 약 197㎡[59.8평]의 2층 구조이다. 성벽은 높이 8m, 폭 9m, 길이 52m로 옥 무늬가 있는 화강암 분석으로 쌓아 장식하였다.

[현황]

영남제일관은 1980년 복원되었으나 규모나 품격이 대구읍성의 남문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읍성은 관찰사 민응수가 장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세운 석성이지만 친일파에게 해체된 아이러니하고 아픈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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