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03
한자 朝鮮銀行 大邱支店 爆彈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7년 10월 18일연표보기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29년 2월 14일연표보기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종료
발생|시작 장소 조선은행 대구지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정의]

1927년 10월 18일 독립운동가 장진홍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탄으로 폭파한 사건.

[개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은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張鎭弘)[1895~1930]이 일제에 저항하고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하여 폭파시킨 사건을 일컫는다.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인 장진홍은 1916년 광복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으로 말미암아 사형을 선고받고 1930년 7월 3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953년 7월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장진홍 기념비가 세워졌고, 2001년 11월 경상북도 구미시 옥계동에 장진홍 동상이 건립되었다.

[역사적 배경]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이념이나 사상은 크게 변화하여, 작탄(炸彈)[손으로 던져서 터뜨리는 폭탄] 투쟁으로 일컬어지는 방식을 비롯하여 독립군 편성 및 항일 무장투쟁의 실행을 목표로 하는 군사 운동이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자리잡는다. 국내에서도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투쟁의 대상은 주로 도청·경찰서·법원 등과 같은 식민 통치 기구,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식산은행 등과 같은 착취 기관이나 관변 조직, 일본 고위 관료, 친일파 등이었다.

[경과]

1916년 광복단에 가입한 장진홍은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오다가, 1926년 1월 경성에서 고향 선배 이내성(李乃成)을 만나 이내성의 주선으로 소개받은 국제공산당원인 일본인 호리키리 모사부로[堀切茂三郞]에게 1927년 6월 폭탄 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웠다.

1927년 10월 17일 자결용 소형 폭탄 하나는 옷에 넣고, 폭탄 상자 네 개를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와서 달성에 있는 매형 김상한(金商翰)의 집에 도착하였다. 10월 18일 오전 11시 무렵 상자에 넣어 놓은 폭탄을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지사가 있는 경북도청, 경찰부장이 있는 경북경찰부, 식산은행 대구지점 순으로 배달하려 하였고, 배달원 박노선(朴魯宣)이 계획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들러 지점장에게 전해 달라며 은행 접수구에 폭탄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화약 냄새를 맡은 포병 출신 일본인 서무주임에게 들켜 지점장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네 개의 폭발물이 연이어 터져 은행 건물과 도로 등이 파손되었다. 이때 일본 경찰 네 명 등 모두 여섯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 일부가 파손되었다.

일본 경찰 1,600명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체포는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1928년 1월 독립운동 전력이 있는 이정기(李定基) 외 여덟 명을 체포하여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재판에 회부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과]

장진홍은 사건 직후 대구를 무사히 빠져나갔으나 거사가 실패한 것을 알고, 제2의 폭탄 투척 계획을 세우면서 같은 뜻을 가진 이들에게 다이나마이트 폭탄를 제조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1928년 2월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동생 장의환의 안경 공장에 몸을 숨겼다가 1928년 12월 도쿄[東京]로 가서 귀족원(貴族院)과 경시청(警視廳)에 폭탄을 투척하고 러시아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1929년 2월 14일 경북경찰부 고등과 최석현 경부보가 이끄는 형사대의 급습으로 체포되었다.

장진홍은 1930년 2월 17일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 취체 벌칙 위반, 총포 화약류 취체령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살인미수, 살인 예비 등의 죄목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항소하였지만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1930년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장진홍은 사형 집행 하루 전인 1930년 7월 31일 새벽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은 1920년대 말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이며, 국제공산당과 연계하여 투쟁이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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