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회사업연구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90
한자 大邱社會事業硏究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대구사회사업연구회 결성
성격 사업사업 단체
설립자 대구의 조선인 자산가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조선인 유지들이 결성한 사회 구제 단체.

[설립 목적]

대구사회사업연구회(大邱社會事業硏究會)는 1921년 대구에서 조선인 유지들이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의 주선으로 사회사업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한 사회 구제 단체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사회사업연구회가 결성될 즈음 대구의 유지들은 10만 원의 기부금을 약속하였다. 1년이 지나도록 약속한 기부금을 내지 않자 대구부와 경상북도 경찰부는 기부금 납부를 약속한 유지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열었다. 1922년 2월 17일 경상북도 경찰부 회의실에서 열린 대책 회의에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2년 2월 28일 도참여관 관사에서 기부금 납부를 약속한 조선인 유지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열고 3가지 결의 사항을 채택하였다. 첫째, 고아원 안에 무직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원조 사업을 경영할 것, 둘째, 기부금은 4회에 나누어 낼 것, 곧 1회는 4월에, 2회는 6월에, 3회는 8월에, 4회는 10월에 내서 완납할 것, 셋째, 조선인 나병원은 부영(府營) 격리 병사를 사용할 것 등이었다. 나병원의 경우 조선인이 사용하는 데 불편 사항이 없도록 대구부 당국과 협의할 교섭위원 5명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위원은 정재학, 이영면, 정해붕, 이선호, 허주 등 5명이었다. 허주를 제외한 4명은 대구의 대표적 자산가들이었다. 허주는 만주 지역에서 항일 세력에 대한 정보수집 및 조선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하여 결성된 친일 단체인 만주보민회(滿洲保民會) 총무로 활동하다 대구에 들어와 ‘고아 수용’, ‘실업자 구제’ 사업을 펼칠 방침으로 영남공제회 결성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대구사회사업연구회는 명목만 유지한 채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하여 대구의 조선인 자산가를 향하여 ‘아등은 우리 사회를 떠나고 민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 존재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며 비판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사회사업연구회는 대구에서 민간 차원의 사회사업을 전개할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나 기부금 납부를 약속한 자산가들이 실행에 옮기지 않아 유명무실화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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