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872
한자 大邱 七星洞 -
이칭/별칭 대구 칠성동 지석묘군Ⅰ,대구 태평로 지석묘Ⅱ,신천 좌안의 고인돌[지석묘군],신천 유역의 고인돌[지석묘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고분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1|태평로2가 12-3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민선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청동기시대 - 대구 칠성동 고인돌 조성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3년 - 대구 칠성동 고인돌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 발굴 조사
소재지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1 지도보기
소재지 대구 태평로 고인돌Ⅱ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12-3 지도보기
성격 고분
양식 고인돌
크기(높이,지름) 120㎝[1호 길이]|120㎝[1호 너비]|70㎝[1호 높이]|110㎝[2호 길이]|150㎝[2호 너비]|110㎝[2호 높이]|140㎝[3호 길이]|180㎝[3호 너비]|170㎝[3호 높이]|170㎝[4호 길이]|160㎝[4호 너비]|180㎝[4호 높이]|150㎝[5호 길이]|200㎝[5호 너비]|150㎝[5호 높이]|200㎝[6호 길이]|80㎝[6호 너비]|120㎝[6호 높이]|200㎝[7호 길이]|130㎝[7호 너비]|80㎝[7호 높이]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일대에 있었던 청동기시대 고인돌.

[개설]

대구 칠성동 고인돌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일대에 있었던 청동기시대 고인돌이며,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 대구 태평로 고인돌Ⅱ로 구분된다. 신천의 자연제방에 분포하던 고인돌 중 가장 하류에 있으며 ‘신천 좌안의 고인돌’ 또는 ‘신천 유역의 고인돌’로 불린다.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은 『대구부사(大邱府史)』에 칠성동 공회당 서쪽에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7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고인돌 덮개돌[상석]에 1795년(정조 19)부터 3년간 경상감사로 있었던 이태영(李泰永)의 일곱 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칠성바위’라고도 불리었다. ‘칠성동’이라는 이름도 칠성바위에서 유래하였다. 대구 태평로 고인돌Ⅱ는 『대구부사』에 칠성정(七星町) 북쪽 도로 위에 있었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위치]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1번지]은 지하철 대구역 소공원[북구 칠성동2가 302번지]에 옮겨져 있다. 대구 태평로 고인돌Ⅱ[태평로2가 12-3번지 일대]는 대구콘서트하우스 도로 맞은편에서 남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 2023년 완공 예정 힐스테이트대구역아파트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위치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조사에서는 덮개돌 아래 냇돌이 깔려 있고, 무덤은 없었다고 하였다. 대구광역시에서 시민회관을 지으면서 1973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의 고인돌 7기를 조사하였지만, 하부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형태]

대구 칠성동 고인돌 1호는 길이 120㎝, 너비 120㎝, 높이 70㎝이고, ‘義斗(의두)’라고 새겨져 있다. 2호는 길이 110㎝, 너비 150㎝, 높이 110㎝이고, ‘義平(의평]’이라고 새겨져 있다. 3호는 길이 140㎝, 너비 180㎝, 높이 170㎝이고, ‘義升(의승)’이라고 새겨져 있다. 4호는 길이 170㎝, 너비 160㎝, 높이 180㎝이고, ‘義甲(의갑)’이라고 새겨져 있다. 5호는 길이 150㎝, 너비 200㎝, 높이 150㎝이고, ‘義準(의준)’이라고 새겨져 있다. 6호는 길이 200㎝, 너비 80㎝, 높이 120㎝이고, ‘義肇(의조)’라고 새겨져 있다. 7호는 길이 200㎝, 너비 130㎝, 높이 80㎝이고, ‘義章(의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대구 칠성동 고인돌Ⅰ은 칠성동 공회당 서쪽에 있었다고 전하며, 대구시에서 공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신축하면서 발굴 조사를 진행한 후 시민회관의 동남쪽으로 옮겼다. 다시 1998년 대구도시철도1호선 대구역 소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칠성동 고인돌에 대한 조사기록에 따르면 상석 아래에서는 냇돌만 확인될 뿐 무덤 등의 하부구조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신천 유역의 가장 하류에서 확인되는 점 등으로 보아 고인돌이 마을의 표시석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가능성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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