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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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黃氏 |
영어의미역 | Changwon Hwangsi|Changwon Hw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연지 |
[정의]
황충준·황석기·황양충 등을 시조로 하고, 황복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황씨(黃氏)는 문헌에 163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평해·장수·창원·덕산·상주·성주·우주·제안·회덕·항주 등 10여 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고이다. 또 위의 10여 본 중 항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평해·장수·창원 등 3본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는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이었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락은 28년에 장군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 그곳에 자리 잡고 살며 황장군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황씨의 시원이다. 황락의 후손에 황갑고(黃甲古)·황을고(黃乙古)·황병고(黃丙古) 3형제가 있어 각각 기성군(機城君)·장수군(長水君)·창원백(昌原伯) 등에 봉함을 받아 훗날 평해·장수·창원 등 3본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연원]
창원 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른바 ‘토황(土黃)’이라 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黃忠俊)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황신(黃信)을 1세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와 공희공(恭僖公)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고 ‘당황(唐黃)’이라 일컬어지는 공희공파, 고려조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황양충(黃亮沖)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파가 있다.
이들 3파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따라서 족보도 따로따로 편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에 ‘당황’이라 불리는 공희공파의 시조 황석기가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황석기가 원나라 사람으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 공주(魯國公主)를 배행하고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져 왔었으나 이미 그보다 20년 전에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曺頔)의 난을 토평하는 등 크게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서 뚜렷이 기록되어 있어 원래 원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입향 경위]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상(黃裳)의 5세손 황복(黃福)이 조선 성종 대인 15세기에 사상구 괘법동으로 들어왔다. 동래 쪽에는 인조(仁祖) 때 입향한 황일매(黃逸梅)에서 비롯된다.
[현황]
1934년 조선 총독부에 발행된 『朝鮮の姓』의 동래군조에는 사상면에 20호가 거주한다고 하였으며,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창원 황씨가 세거(世居) 성씨와 우거(寓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8,905가구에 2만 8836명[남자 1만 4649명, 여자 1만 41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원 황씨는 사상구 괘법동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관련 유적]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산28-6번지에는 효자 황택용(黃澤龍)을 기념한 효자비(孝子碑)가 있고, 동래구 명륜동 235번지의 동래 향교에는 황일하(黃一夏)[1644∼1726] 영세불망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