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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73
한자 栽松洞恩津宋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Eunjin Song Clan in Jaesong-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 뒷골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진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27가구
세거지 재송동 은진 송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 뒷골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에 있는 은진 송씨 세거지.

[개설]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고려 판원사부군 송대원(宋大原)이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은진 고을에 세거지를 정한 뒤, 그의 증손자인 집단공 송명의(宋明誼)가 회덕 땅에 은거하면서부터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송대원의 5세손 쌍청당 송유(宋愉)는 송계사(宋繼祀)·송계중(宋繼中) 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송계사의 아들인 송요년(宋遙年)·송순년(宋順年)이 각각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로 갈리고, 송계중의 아들인 송미년(宋眉年)·송호년(宋胡年)이 각각 주부공파(主簿公派)·장사랑공파(將士郞公派)로 나뉜다. 이 중 송계사의 후대에서 다시 38파로 갈리며, 또한 별보로 영천공파(榮川公派)가 있다.

송계사의 후예로는 송시열(宋時烈)[문묘·종묘에 배향], 송준길(宋浚吉)[문묘에 배향], 송근수(宋近洙)[종묘에 배향] 외에 서원에 향사된 20명 등이 있다. 특히 송준길·송시열·송규렴(宋奎濂)은 3송으로 불린다. 송준길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대사헌·병조 판서·우참찬·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명필로 이름이 났다. 송규렴은 대사간·대사헌·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송시열인조 때 36세로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때 이조 판서, 현종 때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숙종 때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리면서 노론의 영수가 되었고,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송계중의 후예로 동지중추부사 송인수(宋仁壽), 사과(司果) 송예수(宋禮壽), 임진왜란 원종공신 2등 훈인 송응현(宋應賢)과 송걸(宋傑)이 있다. 송계중의 후예들은 주로 무인으로 성장하였으며, 후손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해운대구 재송동은진 송씨는 장사랑공파에 속하는 송인수의 아들로 조직된 삼성공 종중(三省公宗中)이다.

[명칭 유래]

재송동 장산 서북쪽 기슭에 뒷골[後谷]·안골[內谷]·서당골[書堂谷]이 있었는데, 각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부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세 계곡을 통칭하여 뒷골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송인수의 아들 송응지(宋應祉)가 임진왜란 전 회덕에서 동래 장산 아래에 복거(卜居)한 후, 동래 삼성대(三姓臺)에서 처음으로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교훈하면서 살았다. 16세기 말 송응지의 아들 송종조(宋宗祚)·송수경(宋守卿) 대에 동래 동면[현 해운대구] 재송동 뒷골 마을로 들어왔다. 그의 후손들이 유업을 이어 받아 이곳에서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교훈하였으므로, 서당이 있던 자리를 서당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한 이곳에 세거지를 이루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송촌(宋村)이라고도 불렀다.

송종조의 아들 송걸은 동래에 내려온 송응현을 따라 밀양으로 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송응현과 더불어 화왕 산성 전투에 참여하려고 가는 도중 적병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송응현과 송걸은 선무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소재 원계 서원(遠溪書院) 충덕사(忠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송수경의 후손들은 주로 해운대구 재송동에 거주하였다. 송수경의 증손은 송영민과 송계민이다. 송영민의 후손 가운데는 동래부청, 무청에 출입하여 장관청 중군 등을 역임하였다. 송계민의 아들 송초건(宋楚健)은 훈련원 판관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송준방(宋俊芳)·송준호(宋俊豪)·송준업(宋俊業)·송준평(宋俊枰)이다. 송준방은 재송동에, 송준호는 울산 금단리에, 송준업은 동래 북면 남산동에, 송준평은 울산으로 이거하였다. 재송동에 자리 잡은 후손들은 주로 동래 무청에 출입하여 훈련원 판관, 중군, 교련관, 대솔군관 등을 배출하였다.

[자연 환경]

재송동 뒷골 마을은 동쪽으로 장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수영강이 흐르며 그 남쪽에서 온천천과 합류한다. 현재는 도시화로 그 형태가 뚜렷하지 않으나, 본래는 장산의 서북쪽 기슭으로 소나무가 울창한 산골이었다고 전하며, 뒷골·안골·서당골이라 각각 부르던 세 계곡을 통칭하여 뒷골 또는 후곡이라 부른다.

[현황]

뒷골 마을에는 은진 송씨 재실인 재송재(栽松齋)[해운대구 재송1로 31번길]가 있다. 이 재실은 1982년 장사랑공파 각하(脚下) 삼성공(三省公) 송응지 후손이 입향한 유적지에 건립한 것으로, 이곳에서는 매년 11월 첫째 주 일요일에 향사를 올린다. 또 1988년 서당골 서당이 있던 자리에 문중 조상의 유업인 서당을 재현하는 뜻에서 송문삼성학습원[건축 면적 1652.89㎡[500평], 5층 건물]을 짓고 독서실, 도서실, 고시숙(考試塾)을 운영하였다. 이는 은진 송씨 문중에서 옛 조상의 유업인 서당을 연상케 하면서 특색을 살린 교육 기관으로 설치한 학습원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2013년 현재 은진 송씨는 19대째, 27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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