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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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梁洞晋州姜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Jinju Gang Clan in Choryang-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종현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진주 강씨 세거지.
[개설]
우리나라 강씨(姜氏)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14본이 전하나, 『조선 씨족 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시조가 분명한 진주(晋州)와 금천(衿川), 안동(安東),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7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는 모두가 진주 강씨(晋州姜氏)에서 분적하였다고 보고 진주 강씨로 단일화하고 있다. 강씨는 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관서공파(關西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등 5파로 대별(大別)한다.
인헌공파는 파조인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가 금천[현 경기도 시흥]이라 금천 강씨(衿川姜氏)라고도 한다. 이러한 강씨는 진주 지방에서 하씨(河氏), 정씨(鄭氏)와 더불어 진양 3성(三姓)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영남의 전통적인 명문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 강씨는 500년대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활약한 병마 도원수[병마를 지휘하던 최고 군직으로 현재의 합참 의장]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받든다. 신라 헌강왕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판내의령(判內議令) 강진(姜縉)이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져 이때부터 본관을 진주로 정하였으며, 이후 천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주 강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 유일하게 갈라지지 않고 천파 일본(千派一本)으로 지속하고 있다.
박사공파 중시조는 강계용(姜啓鏞)이다. 강계용은 국자박사(國子博士)로 고려 원종(元宗) 때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의 후손은 통정공파(通亭公派)를,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은 통계공파(通溪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소감공파는 박사공의 아우인 강위용(姜渭鏞)이 고려 시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기로 그를 파조로 소감공파라 한다. 관서공파는 관서 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를 파조로 한다.
은열공파는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귀주 대첩에서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한다. 인헌공파는 삼한 벽상 공신 여후(三韓壁上功臣呂侯) 강궁진을 파조로 한다. 강궁진은 고려를 건국할 때 태조 왕건(王建)으로부터 삼한 벽상 공신으로 봉해졌으며 여후(呂侯)로 있었다. 강궁진의 아들이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이다.
주요 세거지로는 박사공파를 중심으로 보면 6세 강창부(姜昌富)의 자손들은 강창부의 손자인 강손기(姜孫奇)·강손수(姜孫壽) 대 이래로 경상남도 의령 땅에 터를 정하여 많은 자손이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그중 일부는 14세 강헌지(姜獻之)가 의령에서 밀양으로, 12세 강이성(姜以成)이 울주 언양으로 옮겨 갔으므로 이후에 이들 지역에서 세거하였던 것 같고, 그 밖에 대체로 12~14세의 대에 걸쳐 창녕의 영산, 고령 등지로 산거(散居)해 갔던 것으로 보이다. 또한 5세 강전보의 8세손인 강복명(姜復明)의 후계(後系)가 경상북도 달성에, 강복진(姜復振)의 후계는 거창에 많이 살았고, 11세 강효정(姜孝貞)의 후계는 경기도 광주에 터를 굳혔다.
4세 강창귀(姜昌貴)의 현손 강종덕(姜宗德)의 자손들은 초기에 경기도 장단(長湍)·연천(漣川)으로 옮겨 가 살기 시작하였고, 10세 강거의(姜居義) 이래 전라남도 화순에, 15세 강모로(姜模老) 이래 경상북도 울진의 평해 등지에 정착한 후손들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11세 강세운(姜世雲)이 큰아버지를 따라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10세 강거효(姜居孝)의 자손들은 12~15세에 걸쳐 경상북도 안동·영주, 강원도 홍천, 전라북도 남원의 운봉 등지에 나뉘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9세 강자의(姜子儀)·강자보(姜子保) 후계는 경상북도 예천의 감천·용궁 등지에서 살다가 10세 강계굉(姜繼肱) 후에 일부가 문경·상주·함양·보은·금산·용인·여주 등지로 옮겨 갔다. 이들 지역에 진주 강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8세 강우덕(姜友德)의 자손들은 진주와 경기도 양평 등지에서 살다가 11세 강자성(姜自盛)의 후계가 1484년(성종 15)경 평안북도 창성(昌城)으로 옮겨 간 이후 창성을 비롯하여 운산(雲山)·강계(江界) 등지에 산거하였다. 강우덕(姜友德)의 동생인 강진덕(姜進德)의 후계는 9세에 경상남도 협천과 황해도 연백에 나뉘어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930년경에 이르러 진주 강씨의 자손들은 전국 각지에 산거하게 되었으며 특히 경기도 강화, 전라북도 순창, 전라남도 여천·영광, 경상북도 안동·상주, 경상남도 진양·의령·고성·사천·산청·남해·함양·협천, 제주도 북제주·남제주, 황해도 벽성(碧城)·안악(安岳)·연백(延白), 평안남도 용강(龍岡)·덕천(德川), 평안북도 박천(博川)·정주(定州)·창성·강계, 함경남도 정평(定平)·홍원(洪原)·북청(北靑)·이원군(利原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0년대에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았다.
[명칭 유래]
초량동 지명은 초량항(草梁項)에서 비롯되었다. 초량은 우리말로 ‘샛뛰’를 한자화하여 표기한 것으로 향토지에 전한다. 샛뛰는 억새·갈대라는 뜻의 ‘초’와, ‘뛰 량’ 자의 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풍수상으로 부산포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이라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초량은 본래 지금의 서구 부민동·토성동 일대를 모두 일컫는 지명이었으나 1906년 구초량은 중구 부평동과 서구 부민동이 되고, 신초량 일대는 지금의 동구 초량동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부산에 입향한 진주 강씨 계열은 박사공파로, 11세 강심(姜諶)의 후손들이다. 강심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밀양으로 귀양 왔다가 사망했는데, 그 후손이 눌러 살면서 일파가 동래로 옮겨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강심의 증손인 14세 강사례(姜士禮)가 지금의 삼랑진으로 옮겼다가 15세기 초에 동래로 다시 이거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후손들 모두가 진주 강씨 족보에는 누락되었다. 그러므로 진주 강씨 박사공파의 부산 입향조는 강사례라고 생각된다.
강심의 아들 강흥숙(姜興叔)도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어 화를 입었고, 손자 강율(姜溧)이 비로소 관직에 나아가 남평 현감을 지내고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강사인(姜士仁)·강사의(姜士義)·강사례(姜士禮)·강사성(姜士成) 네 아들을 두었다. 다른 아들들은 밀양과 삼랑진 등에 세거하였는데, 셋째 아들 강사례가 생업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와 초량 해안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향과 연락이 두절되어 족보에서 사라짐으로써 그 후손들의 세거 형태를 측량할 길이 없다.
[자연환경]
동구 초량동 서쪽은 대부분 산지로 이곳에 구봉산(九峰山)[높이 405m로 조선 시대에 봉수대가 있었다]이 있고, 수정동 서쪽 산지에서 발원한 초량천이 관내를 흘러 부산항으로 유입한다. 주거지의 하천은 대부분 복개되어 있다. 해안은 일제 강점기 부두 축조로 대부분 매립되었다.
[현황]
동구 초량동은 70여 년 전만 해도 10여 가구가 사는 작은 자연 마을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던 곳으로, 날품팔이로 떠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집성촌이나 세거지가 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1904년 조사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에 보면 초량 각 마을 전체에 216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김씨이고, 강씨는 단 3가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934년 발간된 『조선의 성(姓)』에서는 이마저도 사라지고 그 후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