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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1075
영어의미역 Eomgol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엄골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789년 - 동래부 사상면 주례리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주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주례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주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주례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엄골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엄골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1910년경 일제가 조사한 『조선 지지 자료』에는 원곡(院谷)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원(院)이 있던 골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원은 고려 시대부터 지나가는 과객의 숙박지였다. 한글학회에서 1980년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10권인 부산·경남 편에 엄골 마을 이름이 나타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마을 지명을 원곡(院谷) 마을, 엄골 마을, 원골 마을, 은골 마을, 온골 마을, 응골[鷹谷]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형성 및 변천]

엄골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수령이 300여 년 된 고목과 우물이 있어 마을이 조선 시대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마을 명칭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행정적으로 이 지역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동래도호부 관할의 사천면 상단 주례리로 기록되어 있고, 1780년(정조 4) 사천면 상단이 사상면이 되며 동래부 사상면 주례리가 되었다.

1900년대 경부선 철로가 부설되기 전에는 마을의 형세가 매우 컸다고 한다. 경부선 선로가 마을 앞을 가로지르면서 동네 사람들의 전답이 있던 앞들을 차단하여 이곳으로 가려면 철길이나 굴다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주례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되며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구 주례동이 되었으며, 1979년 주례동의 행정동으로 주례 1동이 설치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엄골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엄골 마을 동쪽으로 백양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남쪽으로 승학산엄광산, 구봉산이 있다. 백양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현황]

엄골 마을사상구 주례 1동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지금은 경부선 철도와 백양 대로가 지나는 데다 주택지로 변하여 옛 마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주례 1동에 온골 마을 행복 센터가 있어 마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과거 원골 마을 주민들은 주로 농사에 종사하였으며, 마을 뒷산을 개간하여 넓은 전답을 이뤘다. 원골 마을 앞들을 원앞들이라고 하였는데, 사상 지역 고문서(古文書)에는 원전야(院前野)로 기록되어 있다.

엄골 마을 가운데는 오래된 고목나무가 있다. 원래는 우물 옆에 있던 고목나무로서 수종은 괴목(槐木)인 회화나무이며, 수령은 300여 년 정도 되었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궁궐이나 오래된 양반 가옥, 서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또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서 학자가 나오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양반 집안에서만 심어 왔다. 마을에 이 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오래된 세거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물은 복개되어 없다.

원골 마을에는 10대 이상 되는 성씨들이 3~4가구 있었다. 먼저 남평 문씨(南平文氏)동래 정씨(東來鄭氏), 경주 최씨(慶州崔氏), 함안 조씨(咸安趙氏) 등의 성바지가 살았다. 특히 이곳에서 13대째 살고 있는 남평 문씨는 원골 마을이 세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래 정씨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문중의 고분으로 미루어 15대 이상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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