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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 마을[석대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9190
한자 上里-石坮洞-
영어의미역 Sangri Village[Seokdae-dong]
이칭/별칭 윗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상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영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04년 - 동래부 동상면 석대리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동래부 동상면 석대리에서 동래군 동래읍 석대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2년 - 동래군 동래읍 석대리에서 부산부 동래출장소 석대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57년 - 부산부 동래출장소 석대리에서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에서 부산직할시 동래구 석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동래구 석대동에서 부산직할시 해운대출장소 석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0년 - 부산직할시 해운대출장소 석대동에서사 부산직할시 해운대구 석대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해운대구 석대동에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상리 마을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상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석대(石臺)[돌대라고도 함]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上里) 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불렀다. 석대는 추마산 기슭 대리골에서 흘러 온 하천이 석대천과 합류해 석대교[구 석대동사무소 앞]를 지나는 자리에 있는 바위[너럭바위, 넓고 평평한 바위]의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상리 마을[석대동]은 영양 천씨(穎陽千氏) 집성촌으로 임진왜란(1592년) 때 조선을 구원하러 왔던 명나라 장수 화산군 충장공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후손들이다. 상리 마을은 본래 하리 마을과 한 마을이었다가 분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입향조는 병자호란(1636년) 때 조선에 귀화한 명군의 후손을 잡아들이라는 명령 때문에 동래 석대로 피난 온 천찬석(千贊鉐)으로 알려져 있다.

상리 마을 동명은 확인되지 않으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마을이 속한 석대리는 동래부 동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동상면에 속하였다가 1904년(고종 41) 동래부 동상면 석대리가 되었다. 1914년 동래군 동래읍 석대리가 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석대리가 되었다. 1957년 동래구에 속하였고, 1978년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였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상리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상리 마을 북쪽에는 운봉산에서부터 이어진 산지가 발달해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흘러 남쪽의 석대천으로 유입된다. 산지에서 흐르는 소하천 유역과 석대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마을 북서쪽의 석대동반송동 경계에 옹기골이 있다. 옛날 이 골짜기에서 옹기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남쪽에는 장산이 마주보고 있다.

[현황]

상리 마을은 반송 1동 20~21통 지역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마을 남쪽의 석대천변을 따라 국도 제14호선과 부산 도시 철도 4호선이 통과한다. 마을 북쪽 안골에는 쓰레기 매립장[1987년부터 1993년까지 이용]이 있었는데, 현재는 석대 양묘 공원과 석대 체육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마을 내에 영양 천씨 정려각(穎陽千氏旌閭閣)이 있으며, 마을 북쪽 구릉지에 상리 마을 당산 나무[수령 400년의 소나무로 상당 당산 할배제가 거행되는 장소]가 있고, 마을 가운데에는 느티나무[수령 500년으로 중당 당산 할매제가 거행되는 장소], 마을 남쪽 도로변에는 측백나무[수령 50여 년으로 하당 거릿대장군제를 올리는 곳]가 있다. 마을 남쪽 장산 기슭에 풍산금속이 있고, 그 주변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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