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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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騷動 |
영어의미역 | Rice Scanda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철규 |
[정의]
1946년 7월 부산에서 식량 부족 사태로 벌어진 시민들의 생존권 투쟁.
[역사적 배경]
해방 직후 미군정의 식량 정책은 매점 상인의 엄벌, 미곡 소매 최고 가격 실시, 미곡 수집령, 타 지역으로의 미곡 반출 금지, 식량 배급제 실시, 식량 사찰 본부 설치, 미국을 통한 식량 도입 등에 중점을 두었으며, ‘미곡수집촉성선전부’를 결성하여 미곡의 수집을 독려하고 미곡 수출을 처벌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일제하 총독부의 식량 정책을 답습하면서 강화한 것이었다.
가혹한 공출 정책은 미군정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과 저항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도회지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쌀 부족으로 인한 기아 상태를 가져다주었고 군정 당국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바로 쌀 문제의 해결이라는 결론을 안겨 주었다. 1946년 5월 20일 공포된 미군정 법령 제87호 「부산시에 관한 특별 미곡령」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었으며, 그 구체적 목적은 “미곡을 합법적으로 부산에 반입하는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긴급한 미곡 부족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각종 법령의 제정만으로는 당시의 사태가 해결될 수 없었다.
게다가 1946년 전반기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수재가 확대된 데다가 콜레라까지 창궐하여 생활난이 더욱 심화되었다. 1946년 5월 29일 109명의 환자와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6월 14일에는 부산에서만 265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사망자가 67명이나 되었다. 콜레라와 식량 부족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은 6월부터 폭발하여, 6월 21일 운수국 부산철도사무소 관내 공장 8,000여 종업원이 1인당 배급 쌀과 수당이 적다고 부산시와 중앙 기관을 상대로 생존권 투쟁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투쟁이 예고되었다.
특히 미군정에서 7월 2일 콜레라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로 도령 제7호로써 도내 전역의 여행을 제한하게 되자, 부산과 같은 소비 도시는 식량 부족에 더 큰 위협을 받게 되었고, 부산의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40만 시민이 기아선상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철도원들은 결근까지 하면서 쌀을 구하러 가게 되었고, 초량정의 배급소에는 배급 쌀을 탈취하는 자가 출현하였으며, 급기야 7월 6일 부산에서 대규모 ‘쌀 소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경과]
1946년 7월 6일 부산 시민 4,000~5,000명이 “쌀을 달라!”고 외치며 부산부청에 쇄도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민주 중보』는 이튿날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최초 7월 6일 상오 9시반 경 절영도 주민을 중심으로 1,000여 대중이 여행 증명서 발행처로 몰려가 [부산]부 경리과 유리창 20여 장을 파괴하였으며, 그중 부인들이 선두에 나선 일부는 부청을 몇 겹으로 둘러싸고 ‘쌀을 다오!’ 라고 외쳤다. 이를 제지하려던 부 문서계장은 중상을 입었고, 군중 속에서도 한명이 경상을 입었다. 사태의 중대성에 놀란 도 당국은 경찰, MP[헌병], 소방차까지 출동시켜 부청을 포위, 운집한 군중에게 쌀 아닌 물 배급을 시작하면서 물리치려고 했으나, 흥분한 군중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우리들을 살리라!’ 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 반경 기관총을 장착한 미군 전차 6대가 출동하여 부산 시내를 순시하였고, 그중 몇 대는 도청과 시청에 배치되었다. 이날 출동한 미군과 한국인 경찰은 약 3,000명이었다. 결국 랭튼 도장관이 월요일부터 쌀을 배급할 것과 도령 제7호를 완화할 것을 약속하자 12시가 넘어 군중은 해산하였다.
[결과]
7월 6일의 ‘쌀 소동’ 이후 미군정과 부산부의 식량 정책을 성토하며 부산 시내 정회장(町會長) 일부가 사퇴하였고, 전국노동조합 부산지방평의회[부평]를 비롯하여 사회 각층으로부터 당국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대책 수립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식량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양성봉 부윤은 7월 15일부터 극빈자를 중심으로 시민 7할에 5홉을 배급할 것이라 하였으나 직원조차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직원이 오히려 식량 대책 수립을 부윤에게 요구하는 한편 대책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항의하는 뜻에서 사직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또 식량 문제로 인하여 서정, 대신정 방면에서는 파괴적 사건이 발생하였고, 3~4일씩 결식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며, 한 달 만에 구직자가 무려 12만 명으로 폭증하는 등 해방 직후의 사회 혼란상은 쉽게 수습되지 않고 미군정에 부담을 주었다.
[의의와 평가]
1946년 7월의 부산 지역 ‘쌀 소동’을 통해 미군정의 일관성 없는 식량 정책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 양심적인 정회장들조차 현안의 해결을 촉구하기 위하여 사퇴하는 자가 속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기념행사에서 통일 단결을 외치던 우익 성향의 정치·사회단체에서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좌익 진영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적극적으로 촉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좌익의 활동은 향후 정치적 사안들에 있어서 좌익 진영이 상대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