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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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用吉 |
영어음역 | Gang Yonggil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연극인이자 교사.
[활동 사항]
강용길(姜用吉)[1946~1987]은 부산교육대학의 연극반에서 연극을 시작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강용길은 1973년 7월 17일 부산교육대학 출신들이 창단한 극단 한새벌에 창단 멤버로 참여하였다. 극단 한새벌은 교육대학 교수 이충섭을 중심으로 졸업생인 이성규·강용길·주용욱과 재학생인 김문홍·서성애·강미열·박범식 등이 창립하였으며, 당시로서는 전국 유일의 교사 극단이었다. 극단 한새벌에서 강용길은 주로 기획을 맡아 활동하였다.
1973년 「검찰관」, 1977년 「아득하면 되리라」, 1978년 「누구세요?」, 1978년 「쥐덫」, 1981년 「자기의 귀」, 1982년 「달집」, 1984년 「카덴자」 등이 강용길이 기획하여 올린 극단 한새벌의 공연 작품이었다. 공연을 치르는 동안 강용길은 사적인 업무와 연극 기획 업무를 엄격하게 분리시켰으며, 맡은 업무를 철저하게 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한편으로 강용길은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년 동안 한국연극협회 부산지부[지부장은 허영길·전승환]의 부지부장으로서 연극인의 화합과 후배 연극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부산의 연극계는 부산연극협회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다년간 지속되었던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운영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1986년 4월 15일 개최된 제4회 부산 연극제 시상식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제4회 부산 연극제 시상식 심사 결과에 불복한 극단 예술극장·예랑·부산레퍼토리시스템·처용·부두극장·한새벌 등 6개 극단의 대표들은 ‘한국연극협회 부산지부 임시집행위원회’라는 별도의 단체를 구성함으로써 부산 연극계는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동의공업고등학교 국어교사로서 부산연극협회 부지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강용길은 양분된 협회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윽고 이듬해에 두 단체는 부산 연극제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을 다짐하고, 10개월여에 걸친 분란과 투쟁을 끝냈다.
이듬해인 1987년에 개최된 제5회 부산 연극제에서는 심사 결과를 둘러싼 잡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두 단체의 화합과 부산연극협회의 면모 일신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던 강용길은 3월 13일 부산 연극제의 전야제 뒤풀이를 마치고 중구 영주동 산복 도로에 있던 자신의 전셋집으로 귀가하던 중 객사하고 말았다. 중구 영주동 부산 터널 입구의 봉래초등학교 담 옆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부산연극협회는 부산 시민 회관 소극장 앞 광장에서 연극인장으로, 강용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서중동 산56번지 천자봉 공원묘지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