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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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智庵- |
영어의미역 | Site of Injiam Hermitage |
이칭/별칭 | 인지암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1동 19~2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주영택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1동에 있는 신라 시대 때 건립된 인지암의 절터.
[개설]
1740년에 발간된 『동래부지(東萊府誌)』 ‘불우(佛宇) 편’에 “인지암이 장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인지암은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서는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편이 더러 보이는데, 이는 옛 사찰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변천]
중리 마을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지금의 해운대구 반여1동 선수촌 아파트에서 반여3동의 도로 일대에 해당하는 인지암 앞의 들판을 인절미라고 불렀다. 중리 마을 토박이 주민 이상준(李相俊)[78세]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인지보(仁智洑)가 있는 인절미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이 마을에 부자 농가가 많아져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절미 들판의 논밭과 임야 9만 9,000㎡를 징발 수용하여 현 반여동에 포로 수용소[반여동분견소]를 설치하였다. 그 후 포로 수용소가 거제도로 이전하였고, 이곳에 육군기술병기학교가 들어섰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을 때 선수촌 아파트로 조성되어 44개국 9,307명의 선수가 입촌하였다.
[위치]
인지암 터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1동 장산의 돌산으로 올라가다가 중리 마을에 있는 인지초등학교·인지중학교·반여고등학교·롯데 낙천대 1차 아파트 일대이다.
[현황]
현재 인지암 터에 여러 학교들이 들어서 있으며, 인지암 앞 들판은 20개 동에 2,290세대가 살고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운대구 반여1동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인지들의 지명이 신라 시대에 있었던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연면함과 유구함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