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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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機張邑城 |
영어의미역 | Gijangeup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서부리|대라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에 걸쳐 있는 조선 시대의 읍성.
[개설]
고려 시대 교리에 있던 기장읍성[현 기장 고읍성]이 고려 우왕(禑王)[1374~1388] 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관아가 모두 불에 타 버리자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재의 기장읍성이 있는 곳으로 읍치(邑治)를 옮겨 축조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世宗實錄)』에 1421년(세종 3) 9월 경상 관찰사가 기장현의 성내에 천수(泉水)가 없다고 하여 박곡리(朴谷里)로 옮기기를 청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1425년(세종 7)에 석축을 쌓은 기록이 있어 1421년에 읍성을 쌓을 것이 결정되고 1425년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기장현 읍성은 주위가 1,527척(尺), 높이가 11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2척이며, 적대가 6개소, 문 3개소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383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1개소인데 판 깊이가 20척이고 물의 깊이는 1척이며, 성 밖의 방천(防川)에서 성을 뚫고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어 저수하였는데 깊이는 1척이며,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적대가 6개이고, 옹성을 두른 성문이 3개소이며, 여장이 383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50보(步)이며 성내에 못과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각종 읍지(邑誌)에는 읍성이 “석축으로 둘레가 3,197척이고 성 높이가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내에는 공청(公廳)으로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객사(客舍), 사창(司倉), 인리청(人吏廳), 차성관(車城館), 직금루(織錦樓), 척서루(滌署樓), 식파루(息波樓), 장관청(將官廳), 영방(營房),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고, 성문 밖에는 망풍정(望豊亭), 공진루(拱辰樓), 관덕정(觀德亭), 빙고(氷庫), 구마지(漚麻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위치]
기장읍성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를 포함한 옛 기장 시가지 일대에 위치한다.
[형태]
기장읍성은 옛 기장 시가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석축성으로, 둘레 약 1㎞, 높이 약 4m 정도가 남아 있으며 성의 평면 형태는 말각방형(末角方形)이다. 북쪽으로는 작은 동산을 끼고 있고, 남쪽은 평지인 평산성(平山城)의 형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기장읍성 동문 터[東門址] 주변 약 50m와 서부리 쪽 서쪽 성벽 100m 정도가 비교적 양호하게 잔존한다. 동문 터의 경우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片門式甕城)이 문설주와 함께 잘 남아 있고, 성벽의 잔존 높이는 3~4m 정도이며 지대석에서 10~15㎝ 정도 들여서 207×74㎝, 119×50㎝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서부리 쪽의 경우도 잔존 높이는 3m 정도, 상부 석축의 너비는 2.2m로 잘 남아 있다. 한편 남쪽 성벽도 높이 1.5m 정도 규모로 잔존하고 있으며,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186번지 주변에도 지적도상으로 반원형의 옹성의 흔적이 보인다. 북문의 경우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82번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지나 옹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외 부속 시설로는 적대(敵臺)[문지 좌우에 있는 치(雉)]가 동문 터 남쪽에 남아 있다. 성벽은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하부는 대형석으로, 상부는 소형석으로 잔돌을 끼워 가며 쌓았는데, 간혹 하단부에 큰 돌을 길이로 세워서 쌓은 곳도 있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대부분 바깥쪽의 석축 벽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안쪽은 흙으로 채우는 편축(片築) 방법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지 주변이나 옹성 벽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법을 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훼손되어 없어지거나 주택 담장으로 사용되는 등 보존 상태가 좋지 않으나, 건물 하부에는 성벽의 기초가 잘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의 우물은 동헌 옆에 있었는데 근래까지 학교 우물로 이용되어 왔다고 하며,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기장 장관청(將官廳) 건물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현재 부산광역시는 동문 터, 남문 터, 남쪽 성벽 등을 복원하기 위해 주변의 토지 매입을 진행하고 있다. 1996년 5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기장 고읍성에서 기장읍성으로의 이전 추이를 잘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읍성이다. 한편 동문 터와 남문 터 부근의 성벽에서 울산, 언양, 창녕 등의 지명이 확인되어 당시 기장읍성의 축성에 경상도 주민들이 동원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