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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90
한자 海雲浦
영어음역 Haeun-po
분야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명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포구|만호영
관련문헌 『동래부지(東萊府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7년 - 해운포 만호영 혁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8년 - 해운포 만호영 복설
비정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정의]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던 조선 전기 부산진 관하의 만호영이 설치된 포구.

[개설]

조선 건국 직후 해운대(海雲臺) 주변에 설치된 해운포 만호영(海雲浦萬戶營)은 부산 수군첨제사의 통제를 받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해운포두모포, 감포, 축산포, 칠포, 포이포, 오포, 서생포, 다대포, 염포와 함께 부산진 관하이었다. 부산진에는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사령관이었고, 해운포 만호영 등에는 종4품의 수군만호가 사령관이었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의 해운포라는 지명은 그 진보가 해운대 부근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유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해운대는 동래의 동쪽 18리에 있으며, 산의 절벽이 바닷속에 빠져 있어 모습이 누에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杜沖)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덮여 있어 사시사철 싱싱하고 푸르다.

또한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 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말굽에 차이고 밟히는 것이 3~4인치나 되며,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이는데,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이곳에 대(臺)를 쌓고 자신의 자(字)를 본떠 해운대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즉 해운대최치원의 호인 해운(海雲)에서 왔으며, 해운포해운대 주변에 있어 생긴 명칭이다.

[형성 및 변천]

1457년(세조 3) 1월 16일 하삼도 도순찰사 박강이 하삼도의 진보를 조사한 후에 보고하기를, 해운포는 동래 및 부산과 가까우므로 차라리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고, 세조가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해운포 만호영은 혁파되었다. 하지만 한 달 후에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이 박강의 건의에 대하여 재고할 것을 요청하면서 해운포 만호영 등의 혁파 문제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사람들에게 물어 처리하자고 하였다.

그 결과 1458년(세조 4) 11월 14일 병조에서 비록 해운포가 동래와 가깝다고 해도 제법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부산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밤낮으로 왕래하는 곳이므로 방어상 수군 진보가 꼭 필요하다고 하여 다시 복구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경상 좌수영이 울산의 개운포에서 해운포로 옮겨 오면서 해운포 만호영은 혁파되었다. 1514년(중종 9) 해운포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약 314m[1,036척]이며 연못이 하나 있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해운포 만호영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東萊府誌)』에 “해운포는 부의 남쪽 9리에 있는데, 곧 수영이 진을 옮긴 곳이다. 수군만호가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은 없다[在府南九里 卽水營移鎭處也而有水軍萬戶 今無]”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3.29 한자 수정 해운(海運) -> 해운(海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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