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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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梁客舍外三門改建謄錄 |
영어음역 | Choryang-gaeksa Oesamun Gaegeon-deunggnok |
영어의미역 | Registration for Oesammun at Choryang Guesthou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예정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초량에 설치된 초량 객사의 외삼문 개건 과정을 기록한 책.
[개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정은 왜사(倭使)의 상경(上京) 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왜사들은 부산에 설치된 왜관 내부에서만 외교·통상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왜관을 근거로 조선에서 활동하기 위해 다수의 왜사들이 부산에 입항하였는데, 이들은 왜관에 들어가기 전에 객사에 모셔져 있는 조선 국왕의 전패(殿牌)[조선 시대 지방의 객사(客舍)에 봉안된 패]를 두고 숙배(肅拜)를 올려야 했다.
왜사들이 의무적으로 행하여야 했던 숙배는, 임진왜란 이후 왜인의 상경이 금지되자 조선 국왕을 알현할 수 없는 일본 사신들이 왜관 인근에 설치된 객사에서 조선 국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한양의 궁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예식이다. 두모포 왜관[현재 부산 수정동에 위치했던 왜관] 시절에는 부산진 객사에서 왜사 숙배가 행하여졌는데, 이곳은 조선의 관원을 위해 전용(轉用)되기도 하였다.
왜사 숙배의 기능만을 전담하는 객사는 초량 왜관의 신축[1678]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이후 초량 객사라 불렀다. 초량 객사는 초량 왜관의 역사와 함께 약 200년 간 운영되었고, 왜사들이 부산에 입항한 후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조선 관아였다. 정청(正廳)과 동·서헌을 일렬로 배치한 본체 외에, 외삼문과 내삼문의 부속 건물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일반 영읍(營邑)의 객사 건축 구성과 같다. 외삼문은 객사의 경계를 둘러싸는 담장의 정면에 설치된 대문(大門)이며, 내삼문은 외삼문을 지나 객사의 경내에 다시 영역을 나누기 위해 만든 중문(中門)이다.
원래, 궁궐이나 사당처럼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건물의 출입문은 3칸으로 나눈 삼문(三門)으로 하는데,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은 객사는 궁궐의 위계를 가져야 하므로, 외삼문과 내삼문이 설치된 것이다.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草梁客舍外三門改建謄錄)』은 초량 객사의 출입문인 외삼문의 개건 과정과 공사에 쓰일 재목 채취에 대한 사항을 동래부·부산진·순영 및 수영 사이에서 주고받은 공문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수록한 것이다.
[편찬/간행 경위]
1825년(순조 25) 비바람에 무너진 초량 객사의 외삼문을 개건하기 위해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가 공사 재료 및 인력을 감영(監營)과 수영(水營)에 요청하고, 역소(役所)[건축 공사를 행하던 장소]에 지급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형태/서지]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규 18136]은 필사본으로 1책 33쪽[표지 포함]이다. 1873년 초량 객사 주요 건물 및 부속 건물의 수리 과정을 기록한 『초량 객사 중수 등록(草梁客舍重修謄錄)』과 함께 2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크기는 39.8×24.6㎝로, 1825년 초량 객사의 외삼문을 개건하는 과정에 유통된 공문을 토대로 동래부가 간행한 것이다. 원본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외에, 원본을 탈초하여 간행한 『각사 등록(各司謄錄)』 13권[국사편찬위원회, 1984]에도 503~507쪽에 같은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구성/내용]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에는 1825년(순조 25) 3월부터 이듬해인 1826년 11월 2일까지 초량 객사 외삼문의 개건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비바람 때문에 객사 외삼문이 완전히 무너져 다시 건축해야 하는 상황을 감영에 알리는 훈도·별차의 수본(手本)[공무에 관한 상황을 상관에게 보고하던 자필의 서류]과 부산 첨사의 이문(移文)[같은 등급의 관공서 사이에서 주고받던 공문서]을 시작으로, 외삼문의 복구를 위한 건축 재료와 인력 공급을 요청하는 공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주요 구조물에 사용될 체목(體木)[집을 지을 때 기둥 등의 중요한 부재에 사용되던 재목]과 창호나 각종 장식에 쓰일 수장목(修粧木) 등의 재목 수취에 대한 규칙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리 규칙은 체목을 좌우도의 봉산(封山)[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에서, 수장목·연목(椽木)[서까래] 등을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의 봉산에서 취할 것을 명시할 정도로 상세하다.
수리 규칙은 상황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는데, 감영은 전례에 언급된 바 없는 새로운 봉산에서 목재를 얻도록 하였고, 수영은 벌목할 인력으로 군사력을 동원시키고, 나무의 운송을 위해 전선(戰船)[전투에 사용되던 배]을 빌려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동래부와 부산진이 부산면임[조선 시대 지방의 동리에서 호적 등의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과 초량동임[동네의 공무를 담당하던 사람]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벌목 및 운반 인력을 확보하는 내용을 통하여, 외삼문 개건을 위한 각 관치 기관의 다각적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에는 봉산을 지정하여 벌목하고 마름질하여 운반하기에 이르는 상세한 공정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에 외삼문의 건축적 형태나 구조에 대해 간단히 묘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초량 객사는 초량 왜관 시절 부산에 입항한 일본 사절들이 조선 국왕의 전패에 숙배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러야 했던 대일 외교 시설이다. 왜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왜사들은 초량 객사의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객사 본체의 정청에 진상할 물건을 늘어놓고, 다시 마당으로 나아가 네 번 절하는 예식을 올렸다. 이 숙배 의식을 통하여 일본 사절들은 처음으로 자국의 건축 양식과 다른 조선의 건축 공간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량 객사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공간은 임금의 전패를 모시는 정청이겠지만, 일본 사절이 부산에 도래한 후 처음으로 관망하는 조선 건축은 객사 건축군의 제일 앞에 서 있는 외삼문이었다. 따라서 초량 객사의 외삼문은 객사의 부속 시설임에도 훼손 즉시 수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건물이었다. 동래부·부산진·수영·감영의 관치 기관과 부산면·초량동의 자치 기관이 협동하여 개건을 도모할 만큼, 객사 주요 건물 이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던 초량 객사 외삼문은 초량 객사 전체 건물과 함께 현재 그 유구가 남아 있지 않다.
『변례집요(邊例集要)』·『동래부지(東萊府誌)』·『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등의 사료에서 초량 객사의 개괄적인 규모가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외삼문의 건축 규모, 형태, 재료 등을 기록하여 외관의 특징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건축적 자료로는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관영 건축을 조성할 때 필요한 목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산을 선택하고 목재를 운송하는 과정을 통해, 감영의 행정적 지원과 수영의 군사력이 동원되는 특수한 예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