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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70
한자 釜山政治波動
영어의미역 Political Turmoils in Busa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망양로111번길 65[동대신동 3가 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이승만|장택상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2년 5월 25일연표보기 - 비상계엄 선포
종결 시기/일시 1952년 7월 28일연표보기 - 비상계엄 해제
발단 시기/일시 1951년 11월 30일 -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국회에 제출
전개 시기/일시 1952년 1월 18일 -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국회에서 부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7월 4일 - 발췌 개헌안 통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7월 17일 - 발췌 개헌안 공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8월 5일 - 제2대 대통령 선거
발생|시작 장소 국회 의사당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 1
종결 장소 국회 의사당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 1

[정의]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 파동.

[역사적 배경]

1950년 5월 30일의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이로 인해 이승만(李承晩)은 국회 내에서 지지 기반이 약화되었고, 재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그것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 철교를 폭파해 많은 국민을 사상케 한 일, 수많은 청장년을 굶어 죽고 얼어 죽게 한 국민방위군 사건, 그리고 민간인을 통비 분자로 몰아 학살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고,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야당은 이승만 정부의 실책을 추궁하였고, 이승만의 지지도는 계속 하락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재선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자유당을 창당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이 원내와 원외로 나누어지고 더구나 원내 자유당은 내각 책임제 개헌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1951년 11월 30일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개헌안은 국회에서 1952년 1월 18일에 찬성 19, 반대 143으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 민의인데, 이를 배반한 국회 의원을 소환하자는 관제 데모를 동원하였다. 또한 그동안 유보했던 지방자치제 선거를 실시하였다.

자유당은 이 선거에서 지방 의회를 거의 장악한 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선제 개헌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자신의 심복 장택상(張澤相)을 1952년 4월 20일에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족청계의 이범석(李範奭)과 홍범희(洪範憙)를 내무 장관·차관에, 그리고 대한청년단 부단장 문봉제를 치안국장에 기용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인사들을 치안 행정 관련 책임자로 임명한 후,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태에서 대중 단체와 폭력 조직을 동원하여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반민주적 정치 폭거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1952년 5월 21일 헌병 사령관 원용덕(元容德)은 부산 시내에 공산 게릴라들이 나타나 5명의 미국인과 한국인을 살해했다고 발표하였다. 이어 이승만 정부는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임시 수도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일원과 전라남도·전라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 계엄령을 발동하였다. 계엄사령부는 계엄 선포 다음날인 26일에 국회 의사당으로 등원하던 야당 의원 48명이 탄 전용 버스를 의사당 정문에서 연행·견인하여 헌병대로 끌고 갔다. 헌병대에 끌려간 국회 의원 가운데 곽상훈(郭尙勳)·서범석(徐範錫) 등 야당의 핵심 의원 12명은 국제 공산당의 비밀 정치 공작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다.

이승만은 5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계엄령 해제에 관한 동의안과 구속 의원들의 석방 동의안도 가결되었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민국당의 김성수(金性洙)는 5월 26일의 국회 의원 구속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계엄 선포에 항의하며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미국은 계엄령 해제와 국회 의원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6월 20일 야당 및 재야인사 60여 명이 부산시 중구 남포동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 대회를 개최하자 폭력배들을 동원해 대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후 장택상은 발췌 개헌안을 마련한 후, 구속된 의원들을 석방하고 국회 의원들을 강제로 소집하였다. 장택상은 7월 4일 국회 의사당을 경찰과 군인으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기립 표결을 강행하여 출석 166명, 찬성 163명, 기권 3명으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결과]

1952년 7월 17일 개정 헌법이 공포되고 7월 28일에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이로써 부산 정치 파동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8월 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승만은 부산 정치 파동을 주도하면서 결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0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승만은 전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하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반민주적·반의회적 정치 행위를 일삼았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치 행태는 이후에 일상적으로 반복되었다. 부산 정치 파동은 이승만 장기 독재의 출발점이었다. 또한 부산 정치 파동은 국가 권력이 경찰과 군인, 폭력 단체·우익 청년 단체 등을 동원하여 자행한 직접적인 정치 폭력이었고, 우리나라 헌정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정치 폭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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