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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사 사적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65
한자 明月寺事績碑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 at Myeongwolsa Temple
이칭/별칭 김해 명월사 사적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허왕후길 182[지사동 478] 흥국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사적비
양식 민머리 비석
관련인물 수로왕(首露王)|허 황후
재질 화강암
소유자 흥국사
관리자 흥국사
건립 시기/일시 1708년연표보기 - 명월사 사적비 건립
현 소재지 흥국사 -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478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수로왕(首露王)과 왕비에 관련된 사적을 적어 놓은 비.

[개설]

명월사 사적비(明月寺事績碑)는 가락국의 수로왕과 왕비인 허 황후의 만남을 기록한 비이다. 이 비는 1708년(숙종 34) 김해군 녹산면 지사리[지금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으로 편입]에 있던 명월사 내에 세워졌다. 이후 명월사는 흥국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위치]

명월사 사적비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478번지 흥국사 경내에 있다.

[형태]

덮개돌이 없는 민머리 비석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김해 명월사 사적비(金海明月寺事蹟碑)’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산(金山)은 김해부 남쪽 40리에 있고, 명월사는 산봉우리 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데, 이 절은 수로왕(首露王)이 세운 것이다. 한나라 건무(建武) 18년[42]에 나라를 세우고 분성(盆城)에 도읍하여 국호를 가락(駕洛)이라 하였다. 7년 뒤 왕과 허 왕후가 이 산 높은 언덕 아래에서 만났는데, 장막 궁전을 설치하여 왕후를 맞이하였고, 다음 날 같이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왔다.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렸다. 왕은 그 영이(靈異)함에 감응하여 명월산(明月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뒤에 세 곳에 절을 세울 것을 명하였는데, 흥자(興字)·진자(鎭字)·신자(新字)를 국자(國字) 앞에 붙여서 편액하여 길이 나라를 위해 복을 비는 장소로 삼았다. 신국사(新國寺)는 세자를 위해 세웠는데 산의 서쪽 벼랑에 있고, 진국사(鎭國寺)는 왕후를 위해 세웠는데 산의 동쪽 계곡에 있고, 흥국사는 왕 자신을 위해 세웠는데 산 가운데에 있다. 이 흥국사는 지금 삼원당(三願堂)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두 절은 단지 터만 남아 있다. 산 아래에는 부인당(夫人塘)과 주포(主浦)가 있다. 왕후는 서방국의 공주인데, 바다를 항해하여 와서 이곳에 배를 매었다. 나머지 이적(異蹟)도 매우 많지만 생략하겠다.

본 절은 높은 언덕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있는데, 골짜기가 맑고 그윽하며 샘과 돌이 밝고 상쾌하며, 봉우리가 울창한 것이 참으로 인간 세상과는 다른 곳이다. 지난 임진년에 병화로 불타 없어졌는데, 만력(萬曆) 무오년[1618]에 한 덕망 있는 사람이 다시 일으켜 세워 개사(開士)들이 서로 이어 공덕을 세웠고, 여러 불전과 조상과 탱화들은 내연(乃衍)·일원(一元)·덕장(德莊)·종혜(宗惠)·상진(尙眞)·응준(應俊) 등 여러 선사들이 이룬 것이다.

올해 법당 계단 돌이 완성되었는데, 곤양(昆陽)·합천(陜川) 땅에서 돌을 구해 뱃길로 운송해 왔으니, 또한 신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중수(重修)할 때 무너진 담장 아래에서 등에 ‘건강(建康) 원년 갑신년[144] 3월 감색(監色)’ 등의 글자가 있는 기왓장을 주웠는데, 여기서 장유 화상(長遊和尙)이 서역에서 불법(佛法)을 가지고 오자 왕이 불도(佛道)를 중히 여기고 부처를 받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아! 비운과 안녕이 바뀌어 일어나고 성쇠(盛衰)가 서로 옮겨지지만, 뒷날의 선비들이 부지런히 이어서 수리한다면, 절이 먼 훗날까지 이어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보배로운 산 남쪽에서 일어나니/ 해 뜨는 부상(扶桑)과 가깝다네/ 하늘이 신인(神人)을 내리시어/ 이곳 한 지역을 변화시켰네/ 서쪽에서 배를 타고 동으로 오니/ 큰 바다를 건너왔다네/ 왕께서 장막을 설치하라 하시니/ 친히 부인을 맞이하신 것이라네/ 아름다운 배필을 그리워하셨더니/ 감응이 산신령께 닿았던 것이라/ 그녀를 위해 절을 세우시니/ 우리 선문(禪門)을 지키셨다네/ 저 초연한 정토 세계는/ 이 세상과는 아득히 다르다네/ 훌륭하신 스님이 덕화를 펼치어/ 불법을 통역하여 전해 왔다네/ 임금께서 도를 묻는 마음은/ 저 복전(福田)을 숭상하였던 것이네/ 신께서 복으로 옹호하시니/ 불법의 세계가 만년토록 이어지리. 숭정 병자 후 72년[1708] 태허 후도 승 증원 지음. 수한 씀.

[金山在府南四十里 而寺居峯回林密處 乃首露王所建也 漢建武十八年 創建 都盆城 國號駕洛 後七年 王與許后 相遇於是山高嶠下 設幔殿迎后 翌日 同輦還宮 后解所着綾袴 贄于山靈 王感其靈異 以明月名山 後命建寺三所 以興·鎭·新三字 弁于國而扁之 永爲邦家祝釐之所 曰新國 爲世子建 在山西崖 曰鎭國 爲后所設 在山東谷 曰興國 爲王自爲 在山中 卽是寺 至今稱三願堂 而二寺 只爲遺址 山下有夫人塘及主浦 后乃西土國王女 航海而來 維舟於此 自餘異蹟甚多 而今略之 本寺 在高嶠下乾坐 洞壑淸幽 泉石爽明 峯巒蒼蔚 眞人間別區也 往在壬辰 毁於兵火 萬曆戊午 有一宿德 重扶建 開士相繼立功 諸殿及像幀 乃衍·一元·德莊·宗惠·尙眞·應俊諸師所成 今年 法堂階砌又成 取石於昆陜地 舟棹運遠 又得神助云 重修時 又得一瓦頹垣下背有建康元年甲申三月監色等字 且長遊和尙 自西域奉佛法而來 王之重道崇佛 亦可驗矣 噫 否泰交作 盛衰相遷 後來之士 勤而葺之 豈懼寺之不綿遠哉 銘曰 寶山南起 近接扶桑 天降神人 化此一方 西泛東邁 來泛大洋 王曰設幔 惟彼親迎 追思嘉耦 感及山靈 爲建招提 護我禪門 超然淨界 與世逈分 喬僧宣化 重譯來傳 宸情問道 崇彼福田 神祗擁護 佛界萬年 崇禎丙子後七十二年

太虛之後徒僧 證元 撰 守閑 書]”이라고 적혀 있다.

[현황]

명월사 사적비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되어 현재는 글자를 식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흥국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평가와 의의]

명월사 사적비는 현재 흥국사에 있는 것으로 보아 비문의 흥국사는 이 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흥국사의 이전 이름이 명월사인데, 이 사찰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1618년(광해군 10)에 중건하였다. 1708년(숙종 34) 다시 중건할 때 무너진 담 아래서 ‘건원 원년 갑신 삼월 남색(建元元年甲申三月藍色)’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장유 화상이 인도에서 불법을 가지고 수로왕에게 왔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건원 원년은 144년으로 수로왕 재위 103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기록에 의하면 명월사의 유래는 가락국 건국 초기이며, 이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의 기원이 가락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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