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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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瑬 |
영어음역 | Gim Ryu |
이칭/별칭 | 관옥(冠玉),북저(北渚),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문충공(文忠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아버지는 김여물(金汝岉),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강수(朴岡壽)의 딸, 처는 진주유씨(晋州柳氏)로 유근(柳根)의 딸이다.
김류는 7~8세에 글자를 익히고 기골이 비범하였는데 어른이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하자 곧 ‘군사 소리가 천지를 움직인다[軍聲動天地]’라고 짓자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을 예견했다. 음사(蔭仕)로 침랑(寢郞)[종묘나 능침 등의 참봉이나 령을 지칭함]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장원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와 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김여물이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이고 놀아났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598년 파면되었다. 얼마 후 충청도 유생들이 김류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등의 변호로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었다.
이후 대교(待敎), 주서, 봉교 등을 역임했으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었고, 1604년 여러 관직을 거쳐 용만수세관(龍灣收稅官)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제수된 전주판관에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부교리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있다가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16년 동지겸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명나라에 갔었는데 역관(譯官) 유지녕(劉智寧)이 궁액(宮掖)[궁에 속해 있는 하인]과 친분이 있다고 횡포를 심하게 부리자 중한 형장(刑杖)을 쳐서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명나라에서 돌아와 보고하던 날 심문까지 당했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가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다시 1623년(인조 1)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 신경진(申景禛), 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예문제학을 겸하였다. 같은 해 여름 정헌대부에 올라 양관대제학을 겸하고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 1월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남행하는 임금을 수행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의정부우찬성으로 옮겨졌고, 162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626년 여름 가도(椵島)에 가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 회유하여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 장만(張晩) 밑에서 부체찰사로 있으면서 먼저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 후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전국의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이때 휘하에서 거느리고 있던 포수들을 어영청(御營廳)에 소속시켰으며, 이 해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1628년 봄 유효립(柳孝立)이 모반하자 이를 주도적으로 진압하였고,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 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 군령권을 장악하여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 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하여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그 도형(圖形)을 작성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고, 1630년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반대 주장을 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1633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이듬해 다시 면직되었다.
1635년 국왕은 전국에 교서를 내려 후금(後金)에 대해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면서 김류를 다시 도체찰사로 삼아 청과의 관계 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 뒤 곧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도체찰사로서 각 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 명을 정선하여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1637년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약(盟約)을 맺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637년 5월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를 하여 공박하고, 이어 양사(兩司) 등에서 삭출(削黜), 파직(罷職), 삭탈(削奪)을 주청하였으나 인조의 비호로 문출(門黜)[성문 밖으로 추방하는 가벼운 벌]에 그치었다. 1638년 특명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1644년 3월 심기원(沈器遠)이 반역을 일으키자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였으며, 영춘추관사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홍무적(洪茂績) 등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가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 여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정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있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1647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류는 성격이 엄숙하고 씩씩하며 광명하고 정대하였으며, 겉모습이 호기롭고 시원스러웠다.
김류의 학문은 서인 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했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뒤 서인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갈라질 때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하였으나 될 수 있는 한 서인과 남인을 함께 쓰려고 노력하였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하였으며, 서(書)와 율(律)도 역시 세련되면서도 맑으면서 건실하였고, 글이 또한 기묘하여 공경(公卿)의 비문도 많이 썼다.
문집으로 『북저집(北渚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광덕산 산록에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8년에 세운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찬술하였고, 글씨는 10세손 김상묵(金商墨)이 썼다. 「김류 선생 영정」은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