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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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道一 |
영어음역 | O Doil |
이칭/별칭 | 관지,서파,동인삼학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장리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오달천(吳達天)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 도사(都事) 조간(趙幹)의 딸이고, 아들은 오수채(吳遂采)이다.
오도일(吳道一)[1645~1703]은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랐다. 성강(星江) 조견소(趙見素)에게 글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어 스승을 출세시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庭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制敎)를 지냈다.
문장가와 애주가로 유명하여 1680년 숙종이 내린 글제에 뽑혔으며, 숙종이 과음하지 말라는 충고를 할 정도였다. 1689년 대사성(大司成)·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냈다. 1694년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된 뒤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1695년 예조참판(禮曹參判)·도승지(都承旨), 1696년 이조참판·예조참판·공조참판·호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이듬해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700년 한성판윤(漢城判尹)·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청도 임천군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장성부로 옮겨진 뒤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1706년(숙종 32) 관작이 회복되었다. 후에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로 일컬어졌다.
문집으로 『서파집(西坡集)』이 있다.
1703년 죽산(竹山) 구봉산 선영에 모셨으며,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선영에 있다.
울진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729년(영조 5) 아들 오수채의 녹훈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위패가 고산서원에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해주오씨 종중으로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