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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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鎭 |
영어공식명칭 | Kim Dong-jin |
이칭/별칭 | 국경(國卿),정산(貞山),석포(石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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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김동진 독립의군부 사건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동진 파리장서운동의 독립청원서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김동진 김창숙의 제2차 유림단의거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2년![]()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출생지 | 김동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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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김동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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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동진(金東鎭)[1867~1952]은 1914년 임병찬(林炳瓚)[1851~1916]이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대한독립의군부의 활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 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벌인 군자금 모집에 관여하여 1926년 5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에 연루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동진의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정산(貞山) 또는 석포(石圃)이다. 1867년 1월 8일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에서 아버지 김헌규(金獻奎)와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 봉화 유곡의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1813~1896]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연하의 추천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김동진은 1912년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가 독립군자금의 모집과 국내외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연루·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장석영(張錫英)[1851~1929]·김창숙 등이 추진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청원서,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이후 독립청원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서명자들이 체포될 때 서명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40여 일간 투옥된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25년 김창숙이 내몽고 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자금 20만 원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에 김동진은 아들을 군자금 모집에 참여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金華植)[1902~1950] 등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였다. 제2차 유림단의거로 1926년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체포되어 40~50명이 기소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약 1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1952년 12월 22일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김동진의 문집으로 12권 7책의 『정산집(貞山集)』이 전한다.
김동진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