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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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潘南朴氏 |
영어공식명칭 | Bannam Par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65년 - 입향조 박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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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66년 - 입향조 박침의 6세손 박수가 무섬마을 개척 |
본관 | 반남박씨 -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
입향지 | 반남박씨 입향조 박침 입향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월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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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반남박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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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반남박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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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반남박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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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반남박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탄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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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박응주 |
입향 시조 | 박침 |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박침과 박형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주시의 세거 성씨.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반남박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의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이다.
반남박씨는 지난 5백여 년 동안 영주 지역에 세거해 왔다. 1500년대 초 안동 와룡 가구(佳丘)에서 이거 한 박침(朴琛)[1465~1549]과 박형(朴珩)[1479~1549] 형제의 후손들이다. 한때는 2천여 호가 거주하며 1만여 명 넘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홍문관직제학을 지낸 문정공 박상충(朴尙衷)[1332~1375]의 4대손 박숙(朴塾)[1444~1536]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1458년(세조 4)에 한양에서 종고모부인 안동부사 이중(李重)을 따라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박숙은 능성구씨 집안에 장가를 갔고 안동 와룡에 정착하게 되었다. 박숙은 아들을 세 명 두었는데 장남 박침과 삼남 박형이 안동에서 영주 지역으로 이거 하면서 반남박씨가 영주에 세거하게 되었다.
박침은 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의 잔드리에 처음 정착했다. 박침의 장남 박승장(朴承張)[1490~?]은 문수면 월호리 원창에, 차남 박소장(朴紹張)[1493~?]은 문수면 조제리 간곡에 각각 이거 하였다. 이후 박승장의 아들 박담수(朴聃壽)[1512~1582]가 녹동 방상골에 정착하였고, 박담수의 증손자 박내길(朴內吉)[1624~1710]과 박처길(朴處吉)은 병자호란 직후 문수면 권선리 고랑골로 이거 하였다. 박소장의 둘째 손자 박종룡(朴從龍)[1543~1597]은 조제의 동쪽에 있는 문수면 탄산리 머럼마을에 자리 잡았고, 박소장의 5대손 박수(朴檖)[1641~1709]는 머럼마을의 동쪽에 있는 내성천 강변을 개척해 ‘섬계(剡溪)’라 이름 짓고 살았다. 섬계는 오늘날 영주 무섬마을로 불린다.
박형은 처음 영주 뒤새[杜西]에 자리 잡았다. 이후 가세가 번창하며, 박형의 자손들은 원당(元塘), 귀내[古峴], 수구리[內林], 한정(寒亭), 서리골[蟠谷], 덕바우[德岩] 마을로 터전을 넓혀,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귀내와 수구리마을은 박승임(朴承任)[1517~1586]의 손자인 진사 박회무(朴檜茂)[1575~1666]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정, 서리골, 덕바우에는 둘째 손자인 진사 박종무(朴從茂)[1582~1664]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반남박씨 집성촌이 영주시 문정동[한정, 서릿골],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무섬], 문수면 탄산리[머럼] 등지에 유지되고 있다.
고랑골에는 난고서당, 난곡정, 연방정 등이 있다. 머럼에는 반학정과 환학암이 남아있고, 무섬에는 무섬 입향조 박수의 만죽재 고택과 섬계초당이 있다. 귀내에는 소고사당, 수구리에는 고우당, 한정에는 소고대와 하한정, 삼락당 등의 누정과 재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