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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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興安氏 |
영어공식명칭 | Sunheung A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본관 | 순흥안씨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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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순흥안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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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순흥안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여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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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순흥안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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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안자미 |
입향 시조 | 안리 |
안자미를 시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주시의 세거 성씨.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역임한 안자미(安子美)이다. 순흥안씨는 영주시 순흥면을 관향으로 하여 영주 지역에 오랫동안 세거하고 있다.
순흥안씨 시조 안자미는 고려 신종 때 군사 조직인 흥위위의 정7품 보승별장을 지냈다. 이후 순흥에 정착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안자미가 순흥에 정착하기 이전의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안자미는 안영유(安英儒), 안영린(安英麟), 안영화(安英和)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을 기준으로 1파, 2파, 3파로 계파가 나뉜다.
안자미의 장남인 1파 추밀공파(樞密公派)의 파조(派祖) 안영유의 아들 안부(安孚)[1220~?]는 고려 고종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다. 손자 안향(安珦)[1243~1306]은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지대한 역할을 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안자미의 차남인 2파 별장공파(別將公派)의 파조 안영린은 신기별장(神騎別將)을 지냈다. 손자 안성철(安成哲)이 검교군기감, 안문개(安文凱)[?~1338]는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대제학·전리판서,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을 지냈다. 증손자 안천보(安天保)[1339~1425]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로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냈다. 안자미의 삼남인 3파 교서공파(敎書公派)의 파조 안영화의 아들 안득재(安得財), 손자 안희서(安希諝)는 호장(戶長)이었고, 증손자 안석(安碩)은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행실에 힘썼으며, 그 아들 대에서부터 많은 인물이 나왔다.
순흥안씨의 시조 안자미가 순흥에 정착해 관향으로 삼은 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영주 내 순흥안씨 집성촌은 현 영주시 안정면 대룡산 부근의 용산리와 여륵리이다. 순흥안씨의 용산리 입향조는 안리(安理)이다. 안리는 조선 태종 때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인데, 예천군수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고 그 일대에 ‘대룡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룡산에서 남쪽으로 5리 떨어진 여륵리는 안리의 현손 안서(安琁)가 조선 중기에 개척하였다.
순흥안씨는 영주시 순흥면을 관향으로 함에도 순흥면에는 집성촌은 없으며 70호 정도가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다. 영주 지역의 순흥안씨 집성촌은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와 여륵리가 비교적 오래된 순흥안씨 집성촌인데 두 마을을 합쳐서 9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순흥안씨의 유적으로는 순흥 읍내 남쪽에 있는 향려비가 있다. 향려비는 안향을 기리는 것으로 1636년(인조 14)에 안향의 후손인 안응창(安應昌)[1603~1680]이 세웠다. 안석 일가가 살던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는 사현[안석, 안보, 안축, 안집]이 마셨다는 옛 우물이 있다. 우물 옆에는 중종 때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그 우물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이 우물로 하여 마을 이름도 사현정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