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3월 21일부터 1919년 4월 11일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1919년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영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영주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상수(權相銖)[1873~1941]는 1916년부터 1918년 사이에 영주 지역에서 국외 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베이징[北京]에서 유림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는데, 주로 무기 및 자금조달과 고문 역할을 하였다. 권상수는 권상수(權相洙) 또는 권우송(權又松)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창수(權昌銖)[1892~1970]는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창수는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권창수는 평소 농사를 지으면서도 인근 시장에서 어물장사를 하였기에 세상 물정에...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두갑(金斗甲)[?~1909]은 이강년(李康秊)[1858~1908]이 190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이강년이 체포된 뒤에는 의진의 지휘권을 인계받은 김상태(金尙台)[1864~1912]의 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두갑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출신이다....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봉정(金鳳政)[?~1909]은 190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재기한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이다. 이강년이 순국한 후에는 중군장이었던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봉정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봉정은 1905년 을사늑...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선이(金仙伊)[1878~?]는 1909년 5월부터 9월경까지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 가담하여 수십 명의 병사와 함께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과 봉화군, 강원도 영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선이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덕거촌(德巨村)에서 출생하였다. 김선이는 1909년 김상태...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수갑(金守甲)[?~1909]은 190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일어난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다 이강년이 순국한 뒤에는 김상태(金相台)[1864~1912] 의진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수갑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출신이다. 김수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시백(金時伯)[1887~1950]은 1907년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 중군장 김상태(金尙台)[1864~1912] 진영의 좌선봉에 이어 김상태 의진의 소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시백의 본관 김해(金海), 자는 삼궁(三弓), 본명은 김현세(金顯世)이다.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이며, 1887년 10...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용준(金容俊)[1873~1932]은 1919년 4월 9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일어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김용준은 1873년 6월 13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김용준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에서 열린 풍...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재명(金載明)[1885~1977]은 1910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김재명의 본관은 의성(義城), 이명은 김재명(金在名)이다. 아버지는 김정한(金鼎翰)이다. 김재명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소룡리에서 1885년 7월 13일 출생하였다. 의병활동 당시에는 예천군 승...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김치순(金致順)[?~1909]은 1907년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과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김치순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 거주하였다. 김치순은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자, 충청북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택진(金澤鎭)[1874~1961]은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김택진의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원중(源仲), 호는 동려(東黎)이다. 문절공 김담(金淡)[1416~1464]의 17세손이며, 백암(栢巖) 김륵(金玏)[1540~1616]의 13세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상필(南相弼)[1891~1972]은 1919년 4월 9일 안용호(安容鎬)[1884~1942] 등이 주도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남상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출신이다. 남상필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 풍기장날에 같은...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영진(南永鎭)[1894~1920]은 같은 마을의 최성원(崔盛源)[1894~1926]·안용호(安容鎬)[1884~1942]와 함께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영진의 본관은 영양(英陽), 본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이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계양(朴啓陽)[1888~1937]은 1919년 봉화군 봉성면에서 독립군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박계양은 지금 영주시 고현동에서 출생하였다. 박계양은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변성출(卞聖出)[1881~?]은 1910년 안동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22~1923년에는 영주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성출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학자. 송상도(宋相燾)[1871~1946]는 한학자로서 『기려수필(騎驢隨筆)』을 저술하였다. 송상도의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기려자(騎驢子)·미헌(眉軒)·연파(蓮坡)이다. 시조 송맹영(宋孟英)의 26세손으로 1871년 4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광승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송상도는 어려서부터...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신봉균(申鳳均)[1866~1907]은 1895년 경상도 풍기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8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주흘산(主屹山)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후기의병 시기인 1907년 10월 유인석(柳麟錫)[1842~1915] 의병장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신봉균의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학암(鶴庵)...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봉익(安鳳翼)[1896~1951]은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의 편항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안봉익의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인데, 3.1운동 당시에는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에서 살고 있었다. 안봉익은 1919년 3월 다른 지역에...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용호(安容鎬)[1884~1942]는 1919년 4월 3일 일어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안용호는 1884년 12월 17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안용호는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와 경제적 침탈에 불만이 컸다. 그러던...
-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영주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장터에서 일어났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박인서(朴仁緖)·오하근(吳夏根)·권태중(權泰中)이 주도했다.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준비해 간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하근(吳夏根)[1897~1963]은 1919년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오하근의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농고(聾故)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오응철(吳應澈)이며, 1897년 10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사일마을에서 태어났다. 오하근은 농촌에서 농사를...
-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영주 지역 유림 대표들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한 독립운동.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대표로 한 영남 유림과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대표로 한 호서 유림 등 137명이 유림단의 이름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영주 지역 출신으로 참가한 인사는 김동진(金東鎭...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윤석오(尹錫五)[1870~?]는 1908년 2월부터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 소속의 이용구(李容九)[1868~1912] 부대에 투신하여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1909년에는 충청북도 제천에서 김상태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윤석오는 다른 이름으로 ‘윤석오(尹石...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이교영(李敎永)[1873~1911]은 1907년 문경 지역 김상한(金商翰)[1842~1917] 부대의 좌익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에는 소모장 이명상(李明相)[?~1909] 휘하에서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교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노곡리에서 살았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이경영...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헌(李容憲)[1880~1934]은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었으며, 징역 8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이용헌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 거주하였다. 이용헌은 평소 농사를 짓고 살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덕(李宰德)[1866~?]은 은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재덕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재덕은 평소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공부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고종황제의...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화백(李和伯)[1884~1968]은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화백은 1884년 4월 3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이화백은 1919년 4월 9일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
-
1919년 4월 11일 영주의 장수면 호문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4월 11일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에 있는 청년 손달익(孫達翼)이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윤덕(張潤德)·송득용(宋得龍)·손용백(孫龍伯)·황학명(黃學明) 등과 함께 호문리 마을 앞산으로 올라가서 벌인 만세운동이다. 그러나 호문리를 순찰 중이던 헌...
-
1925년에서 1926년 사이 영주를 비롯해 경상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유림 대표들의 군자금 모집 활동. 제2차 유림단의거는 1925년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시작되었다. 송영호(宋永祜)를 비롯해 영주 지역 출신으로는 송재호(宋在祜)·김동진(金東鎭)·김제직(金濟稷)·권상수(權相銖)·박제형(朴濟衡)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6년 관련자들이 체포...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동진(蔡東鎭)[1878~1967]은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채동진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채동진은 농사를 지었으며, 평소 한학을 공부하였다. 채동진은 일제 식...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봉환(崔鳳煥)[1895~1937]은 1918년 만주 장백현(長白縣)에서 군자금과 의류 등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제공하였다. 1923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봉환의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이다. 최봉환은 영주에서 만주 장백현 14도구로 이주하였다....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성원(崔盛源)[1894~1926]은 같은 마을의 안용호(安容鎬)[1884~1942]·남영진(南永鎭)[1894~1920]과 함께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성원은 1894년 8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최성원은...
-
1919년 4월 9일 영주 지역의 풍기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군 봉현면 농민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이 주도하였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장터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가지고 오후 3시 무렵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 의해 안용호 등 주도자들이...
-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홍사구(洪思九)[1878~1896]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스승 안승우(安承禹)[1865~1896]를 도와 제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제천 남산전투에서 순국하였다. 홍사구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우용(又容), 호는 하포(下浦)이다. 아버지는 홍성유(洪聖裕)이며,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홍훈(洪薰)의 종손이...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황정흠(黃政欽)[1881~1949]은 1919년 4월 9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황정흠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도민(道敏), 이명은 황정흠(黃正欽)이다. 아버지는 황재훈(黃在薰)이다. 황정흠은 어려서부터 신체가 강건하고 힘이 매우 세었으며, 무인의 기질이 있었다고...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황정흠(黃鼎欽)[1889~1955]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황정흠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경(耳敬), 호는 후송(後松), 이명은 황승흠(黃昇欽)이다. 대사헌을 지낸 황섬(黃暹)[1544~1616]의 11대 종손이며, 아버지는 황재석(黃在錫)이다....